낙화유수(이동렬 장편소설 연재 35)

2009-08-09     [편집]본지 기자

35

나는 딸애와 통화를 하고있다. 처녀꼴이 잡혀가는 진이의 모습이 선히 떠올랐다.

진이의 목소리는 언제봐도 똑똑 부러져있다.

󰡒아빠, 아빠나 자기 걱정함다예? 서울서 잘자시구 잘입구 잘노시구, 돈은 어머니가 법니다. 그러니 아빤 자기 벌어 자기 쓰면 된답니다. 나두 이젠 돈만 있으문 절로 살수 있음다. 내 걱정은 하나두 안해도 됨다예?󰡓

나는 목구멍에 솜이 막혀왔다. 애의 눈에도 아빠는 절로 자기를 구제할수 없는 인간임이 틀림없었다. 문학이라니, 누굴 위한 글쟁인가? 와이프의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보얀 얼굴에 끓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느껴진다. 처녀시절 문학에 빠졌고 나를 존경하고 사랑했고 가슴 두근거렸던 어제가 부끄러워졌겠지! 아마 잘 빠져나왔다고 여기겠지!

다시 오사까에 건너가 소식이 없었다.

󰡒그래, 알았다. 우리 따님 용쿠나, 허허. 󰡓

나는 쓸쓸히 핸드폰을 꺼버렸다.

나는 망연해났다. 나에게는 어제도 미래도 없었다. 지금만이 나의 미래요 과거이다. 나는 내 입 하나로 걱정해야 한다. 부부라도 생계장부만은 밝아야 한다. 가정까지 돌보는 와이프한테 나마저 의탁할수 없었다. 빌어먹을, 형의 목소리가 귀전에서 맴돌았다.

― 그놈은 낯에 체면을 분딱지처럼 게바르고 다니는 놈이야. 일정이 끝나면 틀림없이 남모르는 구석을 찾아 숨을거야. 축축하구 더러운 작업복에 안전모를 쓰고 허리를 굽석거리며 온 얼굴에 아첨하는 빛 가득 게바르겠지…그놈은 그러다 다칠수도 있구 병들어 죽을수도 있구 그잘란 돈버는 재미에 오년이구 십년이구 이 바닥에서 굽석거리면서 뒹굴수도 있지…세월이 흘러 어느날 거리에 나가보면 어떤 낯익은 녀석이 술에 취해 비칠거리고있는 꼴을 보게 될거야, 흐흐흐…

그랬다. 나는 배고프면 못산다. 선비정신이라니? 축축하고 더러운 작업복을 입더라도 자기를 살리고 볼판이다. 나는 위기가 서서히 닥쳐오고있음을 예감했다. 괜찮았다. 나의 카드에는 아직 일백만에 꼬리가 조금 붙어있다. 씀씀이만 줄이면 방도가 날것이다…

나의 주거지는 정한데가 없었다. 이래저래 친구들 신세를 졌다. 간혹 찜질방에 들어가 자기도 했다. 한페 7천원씩하는 표값이 아까웠다. 그래도 누구한테 티를 낼수 없다. 죽어도 손은 못내민다. 그게 소위 나의 체면이였다.

유진이는 로인복지사업에 흥미를 느끼고있었다. 중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바야흐로 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될것이다. 로인복지는 어차피 거대한 시장으로 떠오를것이다. 인도주의적인 사업이기도 했었다.

나는 유진이와 서울 외각 W산에 위치한 로인복지시설을 돌아보았다.

그뒤로 5키로쯤 더 올라가면 또 V쉼터가 있었다.

별일이 없기에 나는 흔쾌히 동행을 수락했다.

󰡒우리 V쉼터에 가봐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요. 가면 아는 사람 있을걸요, 그런데 놀라진 마세요.󰡓

󰡒누군데 그래요?󰡓

󰡒가서 직접 확인해보세요. 난 여러번 가보았어요, 우연히…V에는 중병환자들이 많아요. 이를테면 암이나 백혈병이나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이, 건데 놀라운것은 그들이 자기네가 그런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지 않는겁니다.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믿기도 하죠. 부근에 교회당과 유명사찰이 자리잡고있어요, 혹시 신앙은 없으세요?󰡓

󰡒신앙요? 허, 우리의 신앙이사…󰡓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묻는것은 그게 아니였다.

택시는 용케도 산길을 잘탔다. 별로 넓지 않는 모래길이다. 숲이 우거져 하늘을 가렸다. 승용차는 흡사 숲의 동굴로 빨려 올라가듯 했다. 숲을 헤치고 비쳐드는 해빛과 바람에 흔들거리는 잎의 그늘이 묘한 조화를 이뤘다. 해빛과 바람과 잎새들의 설레임과 승용차의 운동감은 꿈만같이 어울어지며 황홀해났었다.

마침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마 그 나그네이리라!

󰡒네, 네…가고있거던요…네, 잘알고있어요…아이, 걱정마세요.󰡓

유진이는 나를 의식해서인지 짤막한 답만 반복했다. 부동자세로 표정에 약간 긴장한 빛을 띠워갔다. 어쩌면 내가 아는 사람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굳이 숨길 리유가 뭔가? 그녀는 핸드폰을 끄고 방그레 웃었다.

󰡒저두 문학은 무척 좋아했거던요, 소녀때는 작가 지망생기도 했었요. 호, 웃긴?󰡓

󰡒정말인가요?󰡓

󰡒제가 뭐 거짓말 하는줄 아세요? 저두 부쉬낀이나 조기천, 리백, 두보의 시를 좋아했다구요. 조기천의, 조선은 싸운다는 백두산의 기백이 넘치구요. 리백의 장편서사시󰡐굴원󰡑은 현란하고 아름아운 시적언어가 인상적이죠, 지금도 인상에 남는건 명월을 마주하고 잔을 들어 벗을 청하니 그림자와 셋이였다는 리백의 시입니다. 후, 속심을 나눌수 있는 벗이 있다는건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 길지 않는 우리 인생에?󰡓

󰡒그렇구말구요.󰡓

나는 문학을 말하고 정을 말하면 금방 속이 누그러든다.

유진이가 불쑥 중국말로 물어왔다. 운전수를 의식해서이리라.

󰡒우리 좋은친구 할수 없을까? 혹 절 낮잡아보는건 아니겠지요?󰡓

󰡒천만에, 우린 벌써 친구가 되였잖아요?󰡓

나도 중국말로 대답했다.

유진이가 내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내 가슴귀에 스며들었다. 감미롭고 긴 여운을 남기였다. 나는 낯선 사람을 보면 점을 치는 습관이 있다. 그 사람의 직업, 나이, 수준, 처지, 나와 발전 가능한 성정과 연분― 우리 사이 피치못할 일이 발생할것 같았다.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감이 잡혀오지 않았다.

.

길은 산 허리로 구불구불 올리뻗었다. 승용차가 느닷없이 계곡을 급강하했다. 느낌이 그랬다. 문득 숲이 갈라지고 쪽빛하늘이 시원히 열리였다. 눈부신 해살이 푸른 잔디위에 뛰놀고있는 너른 공지가 앞에 나타났다. 주위는 장미를 비롯해 이름 모를 꽃담장으로 둘러져있고 뒤로는 원시림을 방불케하는 숲이였다. 나는 숲 저쪽에 솟은 포플러를 보았다. 잎새들이 바람에 하얗게 번져지고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유진이는 이곳 지형과 건물에 대해 짧막하게 소개했다.

󰡒이곳은󰡐빛나는 숲나라󰡑로 유명한 곳이거든요. 인터넷에 잘 알려졌어도 일반인들은 찾기 힘던 곳이죠. 신앙인들이 많이 찾는 편이지요. 이 공지 북쪽에 쉼터가 있고 곁에는 편의약방이 있으며 약방뒤에는 통나무로 지은 구락부가 있는데 여러 오락시설이 마련되여있어요. 사찰은 저 산의 정상쯤에 세워져있고요. 때론 사찰의 풍경소리가 이곳까지 은은히 들려오기도 합니다. 이곳은 세가지가 유명하거든요, 숲과 돌과 사찰이랍니다.󰡓

󰡒그런데 여길 어떻게 알았어요?󰡓

󰡒호, 글쎄…저기 좀 앉았다 갈까요?󰡓

우리는 아름드리 통나무를 베서 만든 의자를 찾아앉았다. 뒤로는 노란 줄장미가 탐스레 우거져 향기를 풍겼다. 꿀벌소리가 들려왔었다.

󰡒여기서 집을 짓다 병든 교포가 있거던요. 사장님의 수하에서 꼬박 3년간 아파트공사장에서 일해왔었지요. 원래 이곳 사장님은 현지 큰공사장의 일감들을 따내 하청주고 돈을 벌던 분이였어요. 발이 넓고 머리 잘돌고 재간이 뛰어난 분이랍니다. 사장님은 그 교포의 사람됨과 일솜씨가 맘에 들었지요. 그래서 내내 데리고 다녔데요. 그래도 어진 교포는 사장님한테 손 한번 내밀지 않았지요. 집세가 아까워 화장실도 없는 지하방에서 꼬박 3년을 살았답니다. 인민페 십만원 더 쓰고 나왔으니 빚을 갚아야했지요. 안해가 2푼 리식을 꿔서 보냈다던가? 기막힌 일이였지요. 3년간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답니다. 여름이면 더위에 악취에 지하실은 숨이 막히고 비가 퍼부으면 정지가 한강수가 되도록 비물이 막 쓸어들었답니다. 세수대야로 물을 퍼내면서 울기도 숱해 울었데요. 한번은 설상가상으로 도적까지 들었나봐요. 로임을 타서 이튿날 저축하겠다고 방밑에 깔아둔것을 잊고 일나갔다 오니 장판이 젖혀진채로 있었다나? 그날밤 사내는 온밤 눈을 부치지 못했데요. 눈물이 하염없이 줄줄 흘러내리더래요. 내가 왜 이곳에서 개고생을 하는가, 사람 팔자 이게 뭔가, 빌어먹더라도 고향에 돌아가 빌어먹는게 낫겠다, 살자고 이만큼 노력하면 중국 가서도 얼마든지 잘살수 있겠다, 내 이 아픔과 이 고독을 누가 알아주겠느냐? 하고 가슴을 쳤댔요.󰡓

그녀의 목소리가 차츰 갈려갔다.

󰡒혹시 유진씨를 살펴줬다는 그 나그네인가요?󰡓

나는 알고싶은 유혹을 참지 못했다.

󰡒네, 그 사람입니다. 하긴 고생 안한 사람 어디 있어요? 그이는 3년을 녀자 모르고 지내왔거던요. 한창 피끓는 나그네인데, 친구들이 술먹고 청량리로 끌어도 마음 한번 흔들리지 않았데요. 빚을 갚기전에는 절대, 절대루 허튼수작 안한다구. 그래 빚을 갚는데 꼬박 2년반이 걸렸다나? 한국경재가 무너지던 아임에푸때라 로임이 낮은건 말할것 없구 일거리도 찾기 힘들었지요. 일꾼을 삼사십명씩 쓰던 오야지밑에서 다 잘려나가고 마지막 서넛밖에 안남은 틈서리에 끼여있었다니 얼마나 열심히 뛰였겠는가 알수 있지요.󰡓

그녀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집요한 내 눈길을 느꼈는지 은은히 귀밑을 붉혔다.

󰡒아이, 그리 빤히 쳐다보면 내가 어떻게 얘기를 해요?󰡓

󰡒미안, 알고싶은게 있어서. 그 나그네를 사랑해요, 유진씨는?󰡓

󰡒어머, 큰일 났네…혹시 이 말씀은 아니세요? 안해가 있는 나그네를 사랑할만큼 당신은 바보였냐, 미안하지두 않느냐, 량심이 있냐구? 중국에 의사하고 계시는 남편이 두눈 펀히 뜨고 기다리고있지 않냐구? 당신은 언제부터 그렇게 형편없는 녀자가 되였냐구? 제 추측이 틀렸나요?󰡓

나는 속이 꿈틀해났다. 그런 의중일수도 있지만 그런 직설적인 질의방식에 당혹을 감출수 없었다. 아무리 친구이기로 약속했거니?

나는 두팔을 펴보이며 너그럽게 웃었다. 미안하노라고 했다.

󰡒호호, 제가 아마 신경이 좀 과민했나봐요. 기실 그런건 오래동안 제 스스로 묻던 물음이였거던요. 나두 그리 형편없는 녀자가 아니니까. 이러면 잠간 이야기가 빗나가는데, 아마 제 얘기를 먼저 해야겠군요. 그런데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네. 선생님과 언제 이런 얘기까지 나누도록 가까워졌는가?󰡓

󰡒글쎄 올시다…󰡓

나도 시물시물 능청을 떨었다.

나는 숲이 설레는 소리이며 새가 우짖는 소리를 들었다. 맑고 예쁜 해빛은 천자만홍 꽃떨기속에서 온갖 향기로 부서지고있었다. 바람은 파아란 잎새들을 흔들면서 깊고 그윽하고 먼 숲속을 유유히 산책하고있었다. 우리가 못나눌 이야기가 무엇인가?

󰡒전, 뭐라할까? 휴, 처음엔 이곳에 적응할수 없으니 스트레스가 얼마나 쌓이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전에 말했지만 한박스씩 사놓은 백세주는 한주일도 못가 금방 달아나군 했지요. 그러면 난 잠도 못자고 올빼미처럼 밖을 나돌아요. 서울시내의 명멸하는 불빛과 흐르는 차량의 불빛띠를 바라보면 어느덧 망연해나고 깊고 이상한 계곡에 빠져드는것 같은 허탈감이 내 가슴에 펑 구멍을 내겠지요. 마지막엔 눈물도 안나오더라구요. 내 의식에는 비단꿈이 오리오리 찢기고 나붓겼지요. 그것들 하나하나 촉수가 되구, 무엇인가 잡히면 놓지 않고 꽉 잡아버리려는 본능이나 욕망의 촉수같은것이, 전 곤경에 빠진 녀자가 어디까지 치사해질수 있는가 알수 있을것 같더라구요. 살기 위해선 벗으라면 벗고 뭐라도 다 할수 있을것 같더라구요. 나는 녀성의 성의식은 먼저 삶의 본능에 뿌리를 두고있다고 봐요. 살기 위한, 살아남기 위한 악착같은 마지막 무기가 성이거든요. 어떤 남자를 사랑해서 받아들일때도 그런 본능은 밑바닥 깊숙이에 깔려있기 마련이구,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뿐이지요. 그런데 남자들은 좀 다른것 같아요. 흔히 욕구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성행위를 감행하지요. 여기에 나온 이들을 살펴보면 그렇더군요. 하긴 그들이 얼마나 어렵고 어지럽게 만났던지간에 나름대로 존재의 합리성이 있거던요…호호, 미안, 내가 뭘 안다구 이런 강좌를 하지? 여기오니 못듣는 말이 없지요? 저 추태 보인것 같아 미안해 어쩌죠? 호호.󰡓

󰡒아니, 무척 흥미진진하게 듣고있습니다. 삶의 진실을 읽는것 같아요.󰡓

󰡒가장 밑바탕의 진실이겠지요뭐.󰡓

󰡒그래요, 가장 밑바닥의…저도 이젠 밑바닥에 있으니까, 그래서요?󰡓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가슴결에 멍든 아픔이 은은히 맞혀왔다. 나올거리는 해빛에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보였다. 내 마음에 뭔가 간절해나고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 물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절 이렇게 믿어주고 알아주니까.󰡓

나는 아량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전 아팠기에 아픈 남자를 동정해요. 지난번에 얘기 올렸지만 제가 절망에 빠졌을때 그이가 선뜻 손을 내밀었지요. 자신의 체험담으로 힘을 불어넣어주더군요. 그날저녁에 전 그이와 동거했어요. 서로간에 아무런 요구나 리해관계가 없이…그날밤 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처음으로 백세주를 안마시고 잠을 청했지요. 달콤한 포도주를 한잔 하긴 했지만, 그 사람이 곧 저의 안온한 항구이고 따뜻한 보금자리이고 희망이라 생각했어요…󰡓

󰡒진정 사랑하는가요, 그 나그네를, 지금도?󰡓

󰡒물론이죠, 사랑에는 딱히 조건이 없잖아요?󰡓

󰡒혹 현실이 용납을 못하면? 밖에 나와 이렇게 맺어진 연분은 림시살이라던데? 귀국하면 언제 그랬냐싶게 종국에는 헤여지고 만다더군요.󰡓

󰡒저두 그런것 생각 안한게 아닙니다. 그런 싱숭생숭한 마음을 품고 귀국했구요. 그런데 남편을 보는 순간 그게 아니구나, 판단이 서더라구요. 가래침을 아무데나 뱉지, 게으르고 탐욕스럽고 돈 쓰기 즐기고 사치하기까지 하지, 제 마누라 죽게 고생하고 와도 살뜰히 보살펴줄줄 모르니 어떻게 같이 살겠어요? 더구나 기막힌것은 한족애인까지 몰래 끼고있더라구요. 그러니 벌어보내면 뭘해요, 그년 밑구멍에 다 들어가는데? 결국 리혼하고 말았지요.󰡓

󰡒음, 그랬어요? 요즘 흔히 듣는 얘기 같네요, 하지만…󰡓

나는 여운을 남기며 하회를 기다렸다.

󰡒알아요, 무슨 말씀인지. 그이한테도 처자가 있기 마련이지요. 전 저때문에 그이가 처자식을 버리지 말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저도 독한 마음을 먹고 귀국했던거구…그런데 전 그이를 놓아줄수 없다는것을 깨닳았어요.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지요. 돌아갈수 었더군요. 참, 그날 정거장에서 우리 부친을 봤지요? 휴, 늙으면 돈이나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있을만큼 있으면 되지! 하지만 사랑이 없는 삶은 상상할수 없더군요. 그렇다구 제속이 편한건 아니지요. 그분의 처자식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돈이 좀 모이면 얼마쯤 보상해주기로 했어요. 저희들이 할수 있는 마지막 인사라고 봐요.󰡓

󰡒그 나그네말인데 정이 없는가요, 처자와는?󰡓

󰡒정이 없다기보다 사정이 그렇게 됐더라구요. 그인 얌전하고 정숙한 안해의 기질과 녀성다운 얄팍한 외모를 사랑했었는데 그게 아니더래요. 로임이 낮고 저축이 없고보니 항상 죄진감을 느끼고 살았답니다. 와이프도 신경났겠지요뭐, 기대하고 왔는데 살다보니 이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 들어겠지요. 마음이 서로 어울어지지 못한것 같아요. 애가 생겼으나 정도 못붙히고 나왔다나?…이곳에서 숱한 고생하고나니 집 식구들의 얼굴도 싹 잊게 된거죠. 기억에도 안 떠오른데요. 그래서 부러 사진도 꺼내보지만 정이 안가는걸 어쩌는가 그래요. 이제 그 사람은 저 없으면 못산데요. 요즘 사랑은 풋나물처럼 여리고 나긋나긋해서 줄창 만나면서 서로 보드덤고 어루고 정을 쌓아야 키가 자란다나? 호호, 그인 많이 배우지는 못했어도 철리적인 말들을 곧잘해요. 그런 점들이 무척 맘에 들더라구요.󰡓

󰡒음, 전 유진씨를 축하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는 결코 자신을 속일수 없었다.

이때 갑자기 정문이 열리였다. 한 녀인이 바쁜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아래우 흰옷에 머리에도 흰수건을 쓴 그녀는 몸매가 약간 실이했다. 막 손을 저으며 다가오자 유진이가 반갑게 몸을 일으켜세웠다. 나도 어정쩡 따라 일어났다. 두 녀인이 서로 얼싸 끌어안고 돌때까지 나는 누군가 알아보지 못했었다.

한참 야단법석을 놓던 그녀가 나에게 얼굴을 돌렸다. 내 손은 금방 꽛꽛한 그녀의 손에 의해 잡히우고말았다.

󰡒아이구, 우리 고향사람이네, 이제 보자고해서 미안해요.󰡓

󰡒네, 천만에요…󰡓

󰡒호호, 아직 절 못알아봐요? 저 경자입니다, 남수색시요.󰡓

󰡒아, 아, 이런?…󰡓

나는 너무도 놀라 입을 하 벌리였다. 경자라니? 이럴수 있는가?

그녀는 틀림없는 남수의 와이프였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