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때밀이 이렇게 했어요"
<김성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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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나는 인터넷에서 중국 조선족 무연고동포를 대상한 첫 한국어능력시험이 곧 시작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제딴은 특대뉴스라고 여기고 친구 명철이한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중학교를 다닐 때 나의 딱친구였는데 그때는 둘이서 하라는 공부는 뒤전으로, 자전거를 빌려가지고는 통화현 허자신이나 금두로 싸다니며 참외를 훔쳐 먹거나 평일에는 저녁 자습도 참가하지 않고 영화보러 다니기도 했다. 가정을 이룬 후에도 래왕이 있었는데 한번은 나에게 많은 자금을 꿔주어 내가 하는 장사에 큰 도움을 준적도 있었다.
근데 그는 내 전화를 받고 시큰둥한 반응이였다. 심양에서 6만원을 주기로 하고 한국행 수속을 다 밟았으니 곧 한국으로 나간다며 어디에 돈 안내고 한국 가는 일이 있느냐며 믿을수 없다는것이다. 내가 이것도 기회인만큼 놓치면 안된다고 수차례 설득을 했건만 막무가내였다.
이어서 나는 친척들에게도 이 소식을 알리며 신분증을 물어봐가면서 일일이 등록해주고 등록금까지 챙겨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의 다 시험에 참가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혼자 덩그러니 대련외국어학원에서 시험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별로 기대하지도 않은 일이 성사되여 추첨에까지 당첨되였다. 이윽고 비자도 바로 나와 2007년 음력설이 막 다가오는데도 마다하고 나는 《신나는》 한국 《나들이》에 나섰다.
정작 서울에 도착하니 앞이 막막해남을 어쩔수 없었다. 필경 외국이고 처음 하는 서울행이라 중국 대륙을 두루 다녀봤다는 나도 어리둥절하여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국어를 좀 한다는 나지만 한글간판의 뜻이 바로 알리지 않아 한참 쳐다보며 궁리해봐도 모르는것이 있어 망설일때가 많았다.
인천공항의 지하철역에서 녀직원의 도움을 받아가며 자동매표기에서 겨우 차표 한장 뽑은 나는 행인들에게 묻고 물어 서울남부터미널에 도착하였다. 그때 나의 호주머니에는 달랑 떠날 때 집사람이 건네준 현찰 5만원(한화, 이하 전부 한화로 표기함)밖에 없었다.
식당일을 하는 처형이 약속된 롯데리아치킨점에서 기다리고있었다. 4500원짜리 치킨을 시켜 먹었다. 이는 내가 한국에서 처음 하는 식사였다. 이윽고 처형은 나를 데리고 다시 지하철을 타더니 영등포역에서 내려 한달에 19만원하는 다솜고시텔이라는 고시원에다 주숙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항상 일에 딸리는 처형은 다시 바빠라고 출근길에 나선다.
처형은 길림사람인데 가엾게도 30대에 남편을 잃고 고생을 많이 했다. 한국에서 식당일이 고달픈지 두 손가락 마다마디가 다 갈라터져 있었다. 처형은 가냘픈 혼자 힘으로 딸과 아들을 키우면서 친정부모까지 모시고있다. 실로 존경이 가는 분이다.
고시원은 중국에는 아예 없는 개념이여서 조선족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단어다. 한국의 지방학생들이 서울에 올라가 시험을 치를 때 공부도 할수 있고 잘수도 있도록 편리하게 만든 시설로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의 려관과 비슷하다. 단지 매일 방세를 내는것이 아니라 한달에 한번씩 결산한다. 내가 주숙하는 방은 두사람만 누우면 꽉 차는 단칸방이였는데 창문이 없어 대낮에도 칠흙같이 캄캄하여 항상 전등을 켜고 있어야 했다. 다행히 난방이 잘되여 있어 좋았다. 밥과 국은 공짜로 제공되였다. 주방기구와 가스도 있기에 자기가 직접 만들수도 있었고 화장실에는 세탁기와 샤워시설이 마련되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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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등포공원정류장 옆골목에서 휴대폰가게를 하고있는 전영길씨를 찾아갔다. 친구가 이미 통화를 해 놓은지라 전씨는 반갑게 대했다. 전씨는 나에게 14만원짜리 모토로라 휴대폰을 외상으로 주었다. 중국에서 나는 노키아만 사용하였는데 한국에서 노키아는 별로 판매가 되지 않는것 같았다. 전씨는 떠나려는 나를 붙잡고 《연변꼬치구이집》으로 가서 식사까지 대접해주었다.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찾으려면 출입국관리국에 가서 외국인등록증을 만들어야 하고 한국 인력공단에 가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여러 가지로 자상히 알려주었다.
그는 한국에 온지 10년이 넘었다. 이미 한국국적에 가입했으며 노가다를 뛰면서 일당 13만원씩 받고있었고 집사람은 휴대폰가게를 운영했다. 겉으로 볼바엔 그들은 한국에서 이미 퍼그나 안정된 생활을 하고있는것 같았다.
전씨는 육체로동을 거의 안해본 나를 어이없다는듯 바라보며 무슨 일을 할수 있는가고 물었다. 나는 뻔뻔스럽게 돈 벌려고 온만큼 아무일이나 닥치는대로 할수 있다고 대답했다. 전씨는 웃으며 환경미화원일이 어떤가고 물어서 좋다고 했다.오후 두시에 나가 새벽까지 도시쓰레기를 실어 나르는 일인데 더러워서 그렇지 월급이 180만원이라 한다. 전씨는 자기의 친구가 한국에 와서 몇년간 환경미화원으로 있으면서 돈을 좀 벌었다고 한다. 재간둥이인 그 친구는 길가에 쓰레기로 버린 컴퓨터를 보이는 족족 수거해 자기가 직접 용산전자상가에 가 부품을 사서 재조립하여 자기도 쓰고 나머지는 조선족들에게 판매하여 수입을 늘린다고 했다. 그런데 운이 없게도 전씨가 그 친구에게 전화하여 문의하니 조선족은 더 안 받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나의 첫 취직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자기가 직접 나서는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나는 날이 밝기 바쁘게 노가다일을 찾아 하려고 직업소개소를 찾아갔다. 직업소개소 사장이란 자는 두툼한 근시안경에 배가 불룩 튀여나온 나를 뱁새눈으로 힐끗 쳐다보고는 코를 벌렁거렸다. 한눈에 햇내기임을 간파한것이다. 나는 말도 두마디 건너보지 못하고 이번에도 코를 떼우고 말았다. 하는수 없어 고시원에서 끙끙 속을 앓으며 며칠 처박혀있었다. 처형이 보다 못해 식당 그릇 씻는 일이 마침 있으니 한번 해보라고 전화를 해왔다. 나는 그런데는 전혀 자신이 없었고 아무런 《전도》도 없어보여 거절했다.
어느날 지하철역에서 서성거리던 나는 무가지(免롤괩笭)를 뒤적이다가 때밀이안마수강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바로 이거다》 하며 흥분되여 스낵커피 한봉지를 사들고 무작정 대림전문학원의 정이녀원장을 찾아갔다. 학비 30만원이 없으니 우선 학원에서 배우고 나서 출근후에 월급이 나오는대로 곧바로 물겠으니 받아주십소 하고 통사정했다. 커피까지 사들고 온 나를 한참 어이없다는듯 바라보더니 나의 처지가 가긍하게 느껴졌는지 마침내 오케이했다. 학원은 대림역부근의 지하실에 있었는데 남녀 수강생 40명은 족히 되였다. 남자교원은 흑룡강에서 온 조선족이고 녀자교원은 한국녀성이 직접 담당했다. 한국에서는 때밀이를 나라시라고도 했다. 나라시는 일본말이 아닌가 싶다. 학원에서는 주로 때밀이 요령을 가르치는데 안마와 구두닦이도 약간 익혀야 졸업할수 있었다. 추운 겨울철 남자들이 증기가 가득찬 안방에서 알몸으로 때밀이를 배울 때면 녀성들은 바깥방에서 안마련습을 했고 그렇지 않으면 반대로 남자들이 바깥방에서 안마를 익히고 녀성들은 안방으로 들어가 때밀이지도를 받았다. 남자수강생들은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고 나처럼 40대가 넘은 수강생은 얼마 없었다. 순간 나는 나이가 원쑤라고 처음으로 이제는 젊지 않았구나 하는 위기감을 느꼈다.
강습생중에는 중국에 있었으면 절대 이런 《천한》 때밀이를 안할 미모의 20대 녀자가 있었다. 그녀는 모든 남자수강생들의 《몽중애인》이였다. 그런데 이 녀자는 왜 그렇게 일이 꼬이는지 학원원장이 일자리를 찾아주면 퇴짜를 맞고 울상이 되여서 다시 돌아오군 하였다. 그것이 오히려 남자수강생들에게는 그녀의 예쁜 모습을 다시 볼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여 여간 기쁘지 않을수가 없었다.
3
점심이면 한시간동안 휴식할수 있어서 수강생들은 밖에 나가 식사를 했다. 나는 아침에는 일절 식사를 안했고 점심과 저녁은 모두 천원짜리 김밥으로 끼니를 에때웠다. 배가 고픈데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식은땀까지 빠직빠직 배여나와 정말 죽을것만 같았다. 중국에선 고생 한번 안했고 육식을 주로 하던 나였으니 말이다. 저녁에는 그래도 고시원이라고 하는 잠잘데가 있어서 다행이였다. 수강생 남녀 몇몇은 수중에 돈이 없어 습기가 축축한 학원의 지하 안마용테이블우에서 덮을것도 없이 취업이 될 때까지 잠을 자야 했다. 그것도 주말이면 숙박이 금지되여 싸구려사우나로 전전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려관은 비싸서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어느 일요일 날, 영등포역 주위를 할일 없이 돌다가 고향선배 한길남씨를 만났다. 그는 정육점에 들어가더니 수입산 돼지고기를 뒤다리 살코기쪽으로 1킬로그람정도 사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나는 그 김에 반찬가게에 들려 염장고추와 김치도 조금 사들고 왔다. 모든것이 천하별미였다. 어쩌다가 40살을 넘어먹고 한국이란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땅까지 건너와서 굶주리고 허기진 고생이 무엇인지 난생 처음으로, 그것도 뼈저리게 느끼게 되였다.
20일동안 악전고투하여 나는 서툴게나마 때밀이요령을 일부 장악하여 충청남도 서천의 한일장사우나로 《사업배캠를 받게 되였다. 사장은 인자해보였다. 나를 데리고 삼겹살집에 가서 포식하게 하고는 일을 시켰다. 사우나안에는 잠자는 방에 전기담요까지 있어 조건이 괜찮아보였다. 식사는 식모가 따로 있어 다른 직원들과 같이 하면 된단다. 그리고 새벽 5시부터 기상하여 목용탕안에 더운물을 가득 채워놓고 반시간에 한번씩 바닥을 닦아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사장은 리발과 머리염색을 주로 하고 짬이 나면 구두도 닦고 음료도 팔았다.
나는 짐을 풀어놓기 바쁘게 사장의 지시대로 손님들이 쓰고난 목욕수건을 가지고 지하실로 내려가 세탁기에 돌리고 건조기에 말리워 다시 손님들이 사용하기 편리하게끔 차곡차곡 쌓았다. 그리고 손님들이 들어오면 《어서 오십시오!》 하고 큰 소리로 인사하면서 옷장열쇠를 손님들에게 건네주었다. 사장이 바쁠 때는 내가 손님의 구두를 닦기도 했는데 아무리 해도 베터랑(老手)인 사장의 실력을 못 따라가 첫시작부터 꾸지람을 당했다. 한참동안 때를 밀려는 손님이 없어 나는 다른 잔일같은것을 보이는족족 거들었다. 마침내 한 손님이 때밀이를 불렀다. 나는 학원에서 배운 순서에 따라 때밀이를 시작했다. 유리창너머로 가만히 감시삼아 지켜보던 사장이 급기야 다가오더니 나의 손에서 타올을 와락 빼앗아서는 자기가 빡빡 밀면서 나를 성난 둥굴소 눈으로 찔러보았다. 이제 금방 강습을 마치고 처음으로 실전에 참가한 내가 눈에 들리 만무했다. 나는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찍소리도 못하고 꾹 참으면서 사장의 《현장지도》를 받았다.
아무래도 안되겠는지 사장은 밖에 나가서 누구한테 뭐라고 한참 통화하더니 되돌아와서 나보고 오늘 저녁 다른 때밀이가 올거니까 당장 떠날 준비를 하라고 호통친다.
하루도 안되여 해고당한 나는 그만 김이 푹 빠져 지지벌개진 모습으로 때밀이는 못하고 저녁때까지 잔일을 견지하였다. 퇴근후 우람진 조선족때밀이가 트렁크를 들고 나타났다. 2년동안 때밀이를 했다는 그는 연변에서 사온거라며 마른 명태 두마리를 꺼내더니 소주나 한잔하자고 말을 건네왔다. 워낙 술을 모르는 나였지만 그날만은 남의 정신으로 소주 한병 다 굽을 냈다. 나는 때밀이가 천하고 더러워 때려치우고 다른 일 찾아간다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지르다가 어느새 남가일몽에 빠졌다. 꿈속에서 나는 한 대형사우나에서 10여명의 때밀이를 거느린 오야지가 되여 수하사람들을 호령하고있었다.
다음에 계속
원제목 : 중국뚱보 김씨아저씨의 서울때밀이 /길림신문 김성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