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유수(리동렬 장편소설 연재 31)

2009-07-14     동북아신문 기자

31

복선녀를 기다린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표정을 짓고 나를 보면 무슨말부터 할까? 생김새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흰자위 선명한 크고 맑은 눈만은 아무래도 그대로일것이다. 가슴이 조금씩 뛰고있음을 나는 감지했다.

아침에 희미하게 끼였던 안개는 이미 사라졌고 밝고 신선한 해빛은 청신한 공기속에 투과되여 뜨거워지고있다. 광화문 교보문고 출구를 빠져나와 나는 리순신장군의 동상과 마주섰다. 나의 뒤에는 머리에 빨간 천을 두른 시위대오가 경찰의 감시하에 나란히 앉아 주먹을 쳐들며 구호를 웨치고있다. 왼쪽 그리 멀지 않는곳에 조선일보청사가 보인다. 벽에 걸린 대형스크린이 뉴스나 광고를 내보내고있다. 오른쪽에 위치한 광장과 그길을 따라 쭉 시선을 던지면 청와대를 감싸고 솟은 삼각산이 보인다. 남반도의 중심지, 복선녀가 이곳을 상봉의 장소로 택한 곳. 특별한 리유는 없다. 입국한지 닷새만에 데이트가 이뤄졌다. 그간 문학행사에만 참가했을뿐 나는 누구도 찾지 않았었다.

행사가 끝나자 나는 가방 하나만 달랑 메고 사처로 쏘다녔다. 사진을 찍고 메모하고 마음 정리를 해나갔다. 덮치고 겹쳐지는 인파는 나를 초췌하게 만들어갔다. 나란 생명은 얼마나 보잘것 없는가. 흔적없이 증발한다 해도 누구 하나 눈치 채거나 눈 한번 껍쩍해줄 사람 없을것이다. 생명은 그래서 또 소중하다. 나란 생명이 없다면 이 하늘과 이 세상, 이 사람들을 알수 없을것이요, 인간문명을 누리며 하느님이 선사한 생명의 은혜를 체험하고 축복받을수 없을것이다. 나는 저도 모르게 연연해지는 미련과 정을 억제할수 없었다.

종로3가에서 나는 인사동으로 빠져갔다. 골동품거리, 옛것, 민속적인것이 가게마다 차넘치고 즐비했다. 길 저쪽, 꽤 너른 공간을 리용하여 대학생들이 거리공연을 하고있다. 인파속의 자연스런 열창이 내 가슴을 흔들며 감동을 실어주었다. 해빛은 얼마나 밝고 부드럽고 아름다운가. 손잡이뜨락또르들을 몰고 기차를 타고 시내로 연변가무단공연을 보러가던 정경이 우렷이 떠올랐다. 마을사람들은 그때마다 거의 술에 취해 돌아왔고 알딸딸해진 엄마는 꽃밭에 쭈크리고앉아 풀을 뽑았다. 당신의 십팔번지를 흥얼거렸다…

나는 길가에 앉아 다리쉼을 했다. 무심결에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부지런히 문자메시지를 써나갔다. 물론 당신의 핸드폰에 발송했다. 복선녀, 우리의 유희는 그로부터 시작되였다.

A: 안녕하세요? 전 김진규씨 고향친구입니다, 1년선배구요. 자기소식 알려거던 댁을 찾으라기에 메시지합니다.

B: 아, 반가워요. 그런데 핸드폰을 쳤더니 댁이 받지 않더군요.

A: 핸드폰 마이크장치가 고장났어요.

B: 네, 저두 진규씨 소식 애타게 기다리고있는 중입니다. 전화왔던가요?

A: 어제밤에, 한번, 댁은 진규씨 만나기 거북하다면서요?

B: 무슨 말씀을?

A: 진규한테서 우유곡절 들었어요. 그렇다면 제가 권유해볼게요.

B: 불편한점 없어요. 우린 그런 사이 아니에요.

A: 그래도 곁사람 눈치 봐야하고 신중해야할게 아닌가요?

B: 우린 과거가 있으나 지금은 고향친구일뿐이에요.

A: 지금은 사랑하지 않나요? 실례이지만…

B: 왜 그런 대답 해야지요? 미안요.

A: 솔직히 진규가 알아보라고해서요. 불편하면 만나지 않겠다던요.

B: 진규씨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A: 확신합니까, 어떻게 알아요?

B: 이 대답도 드리기 바쁘군요. 전 진규씨를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A: 진규씨도 그런 말을 하던데…어떻게 안다는걸까? 재미있네요.

B: 그건 비밀이구요, 그럼 만나러 오라 하세요.

A: 솔직히 선녀씨가 겁나답니다. 죄스럽기두 하구…

B: 피차일반이지요. 고향친구는 영원한 친구라고 전하세요.

A: 고향친구는 영원한 친구? 훌륭한 말씀, 알았어요.

… …

나는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베먹었다. 속에 찼던 거품이 어지간이 빠지자 눈굽을 문질렀다. 은연중 눈언저리가 뜨거워났었다. 과거 우리 사이 무슨일이 생겨났던간에 서로를 믿는 마음만은 변치 않을것이다. 애인이 친구가 되여도 괜찮았다. 서로 어떤 영원을 간직하고있으니까. 고향친구는 영원한 친구란 말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일것이다.

복선녀, 당신의 목소리는 아직도 저 먼 바다 건너에 있다. 고향의 넓은 들에, 초가집에, 강가에, 남수네가 지은 별장부근 북산에, 우리의 발걸음이 닫던 곳곳에 남아있다. 흰자위 선연한 눈에는 동네의 웃음소리 말소리가 비껴있다.

나의 핸드폰이 느닷없이 울렸다.

<<여보세요…>>

상대방에서 웬지 감감해 있다. 어떤 예감이 왔다. 핸드폰을 끌수도 없다. 나는 이미 숨소리를 감지하고있다. 아득히 먼곳, 당신의 숨소리였다.

<<흐읍, 핸드폰 마이크장치를 고쳤어요?…왜 그러는데 응?>>

<<으응, 고쳤어. 미안…>>

<<그럼, 한시간후에 광화문에서 만나, 우리 만나서 얘기해요.>>

더 변명하고 상의할 여지도 주지 않고 그녀는 신호를 끊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어지럼증이 왔었다.

복선녀(卜仙女), 당신은 기억하고있는가, 고향 마을앞을 꿰질러간 곱게 휜 두줄기 레루를? 빛나는 레루우에 당신은 앉아있고 당신의 무릎을 베고 나는 누워있었다. 어디선가 렬차는 바야흐로 출발했을것이고 우리의 이마우에는 7월의 태양이 불타고있었다. 이제 당신이 떠나온 그날의 철길은 아득히 멀어져 갔고 그 빛의 그림자마저 나의 뇌리에서 사라진듯 싶은데 세월의 기차에 몸을 맡긴 우리가 이곳에서 재회할줄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산사람은 언제가도 만난다는 할매의 말씀은 진리였다. 우린 꼭 만나야 했다.

그러나 긴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 시간 쯤에 나는 한 녀인을 보고있다. 길 건너에 자가용을 세운 그녀가 손을 저어보였다. 흰티에 흰바지가 차의 람보석빛과 어울려 뜨거운 해볕속에서도 편하고 서늘하게 나붓기듯 싶다. 긴머리를 뒤로 젖히고 미황색 안경을 벗자 희고 부드러운 살결에 강한 해빛이 조명해왔다. 그녀가 구름같이 생각된다. 잡자고해도 잡을수 없는, 우리 사이에 엄청난 세월이 무마되여 갔고 어쩔수없이 서로 낯설어져 있다. 당신이 아니라 생각했다. 왜 저기에 와 있단 말인가? 낯선 곳, 낯선 무리들속에서 멀어져있단 말인가? 그녀가 손을 흔든다. 서너발자국 뛰여오다가 멈춰선다. 스치는 행인들이 시선을 막아왔다. 나도 급히 일어났다. 순간 빛나는 레루우에 앉아있는 한쌍의 커플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한줄기 진한 피가 내 심장을 관통해갔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서있다.

그녀가 거짓처럼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못났네, 뭐야 이게?>>

<<글쎄…>>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표정을 지었다. 널 찾기 힘들었다는것, 차마 만날 용기 없었다는것, 그런 심정 알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피지 않았다. 괜히 섭섭해났다.

<<마중 못나가 미안했어요, 사정이 있어서, 이따 얘기 해줄게. 자, 타시지…>>

<<차 뽑았다더니 괘찮아 보이네.>>

<<그냥, 쑬쑬해요. 대한민국사람이라면 다 갖고있는데뭐.>>

<<변했다, 너―…>>

<<좀 여워였지? 목소리도 쉬쉬하구.>>

<<그래, 눈굽에 꽤 는 잔주름도 그렇구, 그보다 스타일이 틀리네.>>

<<호, 어떤데? 나란 녀자 어느 때는 스타일이 있었는감?>>

<<있었지, 널 보면 친근하구 사랑스럽구. 내가 아무리 성을 내두 다 받아들일것 같은 누나같구 엄마같구, 그러면서도 고집스럽구 주견이 뚜렷하구…>>

<<오머, 왜 이래? 또 칭찬해줄거 있니?>>

<<할말이야 많고많지, 다 지나가버린것을, 한줄기 소나기처럼! 그런데 지금은 낯설기만 하네. 널 일찍 떠나보내서 그런것 아니구, 낯선 어떤 스타일이 나를 어렵게 만드는것 같아요. 그게 뭔지 나두 딱히 모르겠지만…>>

<<소설 그만 쓰시지? 호호, 넌 제법 말에 콩기름을 잘바르네, 전 아직두 복선녀랍니다. 그러니 입씨름 그만하시구 얼른 오르시그래?>>

<<그래, 가서 회포나 풉시다.>>

아닌게 아니라 입안에서 나는 어떤 기름기가 느껴졌다. 내가 변한것일까? 무언가 보여주고싶었는데 시시해졌고 속되여갔으니까.

그녀는 한국식 보통 빌라에 살고있었다. 약간 외지다싶은 곳 단독 주택, 줄장미가 담장을 타고 연분홍빛을 탐스럽게 발산한다. 목련나무에 목련은 져있고 담장아래에 놓아둔 즐비한 화분통들에 이름 못할 소박한 꽃들이 질박히 피여있었다. 처마밑 가까운곳에 포도넌출이 손우로 넉넉히 줄을 타고있고 아래에는 참대로 엮은 흔들이의자와 긴다리 상이 놓여있다. 누가 보다가 엎어놓은 소설책 한권이 유난히 눈에 띄여왔다. 똘스또이의 󰡒부활󰡓이였다. 그녀, 혹은 그녀 남편의 어떤 취향을 말해주는 꾸밈새에 나는 당혹스러워 났다. 익숙한 어떤 느낌이 은근히 겁을 주고있었다.

<<집에 있소?>>

나는 그녀 남편의 호칭을 삼가해버렸다.

<<아니, 외출했어요.>>

그녀는 갑자기 이도저도 아닌 인칭을 써나갔다.

<<그냥 편하게, 예전처럼 말을 낮춰 쓰자구.>>

<<그러지뭐, 집안이 루추해서, 커피숍에 가 앉을까 생각했는데 미안,>>

<<깔끔하구 좋네뭐, 뜨락에 포도넌출이 마음에 든다. 마치 어떤 추억이 그윽히 살아있는것 같아 가슴마저 섬뜩해나네.>>

나는 말끝을 흐렸다. 괜한 말을 했나 싶었다.

<<괜찮어, 나두 추억이 좋아, 그리고 솔직한 표현을 좋하한다. 사람 맘 맞추면서 복잡하게 말하구 사는게 싫구 머리가 아프다. 참, 쥬스 한잔 줄까, 포도? 귤쥬스?…>>

나는 제주산 감귤쥬스를 청했다.

솔직히 빌라는 수수했다. 응접실은 부엌과 이어졌고 화장실을 사이둔 좁은 방 둘이 미닫에 의해 가리워져있다. 그런데로 식기와 냉장고, 에어콘까지 갖춰져있다. 벽에 걸어놓은 기타가 유난히 내 눈길을 사로잡아왔다.

<<저 기타 가져온거야?>>

<<응, 버리기 아깝잖어? 우리 그이도 기타소리를 듣기 좋아해, 내가 기타를 치면 음치인 주제에 용케 따라하는것 있지? 못말린다니까, 호호.>>

그녀는 거실에 들어가 편한 속옷을 갈아입고나왔다. 반바지, 반팔의 런닝그는 흰색이였다. 흰얼굴도 그렇고 풀어헤친 머리가 금방 잠자다가 침실에서 나온것 같았다. 나의 앞에 앉던 그녀는 내 눈길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가만히 웃으면서 일어나 세면실로 들어갔다. 좀후에 그녀는 화장을 하고 머리를 빗고 생기있는 얼굴을 해서 나왔다.

<<미안, 너무 좋으면 이렇게 엄벙댄다니까. 그래도 우리 집에 온 손님인데…>>

<<손님? 그래, 이젠 손님이구나.>>

나는 괜히 마음이 쓸쓸해났다.

아무런 치장도 없이 마주 앉아있는 그녀가 더 편하고 좋았을걸. 나는 다시금 우리가 서로 껴안고 만지고 어쩌고 하던 밤이며 그런 밤들에 나붓기는 달빛과 땅과 하늘이 조화를 만들어내는 기운과 새벽녁의 부연 안개나 찬기운과 그러고 그런 운치가 가슴 깊이에서 태동치고있음을 미미히 느꼈다.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면 금방 옛날로 돌아갈것 같았다.

선녀가 샴푸내를 풍기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책꽂이에서 사진첩을 뽑아 내밀었다.

<<내 추억들이야, 이젠 추억이 소중한줄 알 나이가 된가봐.>>

사진은 년대별로 꽂혀있었다. 성장별 순서였다. 아무것 가림새없이 찍은 백일사진이 첫머리를 장식했다. 크고 머룽한 눈은 선할 선자를 도장박고있다. 담요 깐 걸상에 알몸의 계집애가 앉아있다. 한팔을 들고 뭐라 연설할 자세이다. 자, 나의 세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고! 그녀가 내 어깨를 슬쩍 건드려왔다. 순간 나는 그녀 살내음까지 물큰 맡는다. 농밀한 어떤 분위기가 엉켜왔다. 서구산(西歐産) 포도주처럼 년대가 확실하게 박혀진것 같은, 그 시절의 냄새를 나는 맡았다. 붉은넥타이를 맸거나 팔에 홍소병완장을 찼거나 수학경색에서 장원해 상장을 받거나 논에 다리 걷어올리고 들어서서 흰수건으로 땀을 닦고있거나, 흑백사진들은 한결같이 푸근한 추억의 그라프들이였다. 나는 칼라사진은 보고싶지 않았다. 그녀와 그녀 남편의 웃는 꼴 보기 싫었던것이다. 해도 끝내 보고야 말았다. 나이 지긋한 나그네이다. 머리가 반백이고 뚱뚱하고 선글라스를 꼈고, 두툼한 입술에 얄궂은 미소가 피여있다. (반감이 앞섰는지 모른다.) 나그네는 늘 뒤에 붙어서서 복선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놓고 여유있는 포즈를 취했다. 강과 바다와 산과 들과 건물과 꽃과 나무와 뭇사람들속에 뭉툭한 손은 복선녀의 곡선미 유연한 어깨를 짓누르고있었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이야? 기분 나쁘네, 괜히 질투난다.>>

아아, 그런말 꼭 했어야 했을까. 복선녀가 선택한 사내가 나보다 훨씬 낫다면 오히려 맘 편해졌을걸. 헌데 낫다는 기준이 뭔가? 젊고 학식 좀 있고 인물 좀더 잘나고, 그 외에 뭐가 더 있는가? 또 있다. 나는 진정 사랑했고 청춘을 다 바쳐 사랑했다. 무엇보다 그게 요긴했다. 그녀한테는 그런것이 소중하지 않단말인가? 예전에 느꼈던 짙은 실망감이 엿같이 가슴에 녹아든다. 안일, 사치, 금전, 질투, 허위, 배반―, 그런 대명사가 곧 녀성이라 누가 말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당신도 녀자일수 밖에 없지 않는가!?

당신은 불시에 내 볼에 입술을 슬쩍 갖다 댔다가 떼며 시물거렸다.

<<귀여워, 여전하네.>>

<<임마, 귀엽다니?>>

불의의 습격에 나는 당황해났다.

<<호호, 소설가님이 그런 충격도 감당못하다니? 여기 사진들 좀봐, 디지털카메라로 찍어서 뽑아낸것이거든, 기억에 아마 있을걸?>>

그녀가 다른 사진첩을 건네주었다. 나는 어리둥절해났다. 친근한 느낌이 농밀해갔다. 예전에 진수형이 그린 그림들을 모아두었다가 현상한것, 라체그림 몇점도 있다. 저문녘의 창가에 라체로 앉아 기리기떼를 바라보는 소녀, 뭐, 그러루한 그림들이다. 복선화의 반면상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귀국전에 그녀한테 들렸으리라. 나는 문서가방에서 원화(原畵)를 꺼내보이였다. 그녀의 눈에는 금시 생기가 돌았다.

<<기집애, 날 달라해도 기어코 주지 않더니? 이 그림은 스케치하듯 대충 그렸어도 진수오빠의 그림중 기중 괜찮아보이거든, 나 이제 진수형그림 소장가이다. 아마 이십여폭은 될거야. 여기 사진에 있다시피 성정이 깡패같아도 재간 하나는 알아줘야지. 진수오빠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좀더 좋은 환경을 만났으면 성공했을건데? 참, 이 그림 나한테 선물할거지? 아까우면 섭섭치 않게 보상해줄께 응?>>

<<그래, 아깝다. 날 장사꾼으로 만드니 아깝지 않을수 있냐? 자식.>>

<<건데 왜 만나자마자 데퉁스레 욕부터 하냐, 이제보니 웃긴다 너? 호호.>>

그말에 나는 더수기를 긁었다. 멋적게 웃어보였다.

<<이거 세월이 정말 흐르긴 흐른 모양이네…미안…>>

<<호호, 괜찮아요, 남들 앞에서도 습관되면 문제 생길가봐그래, 보호차원에서.>>

<<알았어요. 건데 난 니가 어디까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감이 안잡힌다.>>

나는 짐빗 혀를 찼다. 내등을 철썩 쳐오며 당신은 눈을 곱게 흘겼다.

우리의 화제는 자연스레 진수형한테로 흘러갔다. 나는 진수형을 만나보았다는 선화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선녀도 대충 알고있었다. 로또당첨, 서울녀인과의 동거생활, 그런 의혹들이 미궁을 만들어왔다. 언제나 말썽 많은 신비한 존재였다.

<<나두 몇번 만나보지 못했어, 건강이 별로 안좋아보이데. 선화말따나 인차 갈라졌어요. 번다마 바쁜 행색이니 밥 한끼 사지 못했어. 그리구 서울녀자는 만나보지 못했구, 사정이 안좋아보였어, 어쩐지 측은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구. 좀만 재간있는 화가라면 예술가로 대접해주는데, 그림만 잘 그리면 떵떵거리며 살건데, 참 안됐더라.>>

<<시운탓만 할게 아니지. 형 자신도 문제가 많아요, 인생관이.>>

우물을 파려면 한 우물을 파라고 했고 예술가는 예술과 돈을 혼돈하지 말라 했다. 돈냄새 풍기는 예술가한테 뮤즈는 신의 예시를 내려주지 않는 법이다. 형은 이도저도 아닌 극단에서 인생을 허비해왔었다. 어려서는 화가로 거듭나기 위해 집념했고 돈맛을 알아서는 성숙된 인생을 주색 은은히 비치는 장사에 성패를 걸었다. 성화를 알리던 장사는 느닷없이 파행을 거듭했고 인생도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들고말았다. 고개 들고 함정 우를 올려다 보니 별은 어느덧 멀어져갔었다. 해서일까? 형을 생각하면 금시 우울해지는 마음 금할수 없다. 그의 화필에 그려진 우리 가문의 락화류수가 선해하군 했다.

나는 골을 저으면 동을 달았다.

<<나는 형의 천부를 부정하지 않는다. 솔직히 감각이 남다르지. 농후한 자기만의 색채감과 엉뚱한 발상, 그건 화가가 갖춰야할 기본소질이요, 천부라해도 무방하지. 형은 그런것을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지. 휴, 천재가 천재로 거듭나지 못하는데는 운세도 운세지만 성실한 인생자세가 부족한데 있다고 나는 본다.>>

<<말이야 그렇지, 나는 진수오빠를 동정하고싶어. 처지를 좀 생각해봐라. 어릴때부터 곁에서 따뜻하게 잡아주는 사람없이 커오지 않았냐? 그렇다고 니네 엄마 욕하는건 아니다. 난 그 심태를 알것 같다. 중도에서 화필 꺾은것도 리해할수 있을것 같구…>>

그에 나는 괜한 반발심이 생겼다.

<<허, 알긴 뭐가 알구 리해는 어떻게 해요?>>

나는 예술학교 선생, 그러니 내 와이프의 사촌언니와 결혼할때부터 진수형의 불안한 앞날을 예고할수 있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형이 아버지한테 쫓겨난 후 연길에 가서 처음 만났을때였지. 조양술 한병 사들고 들어가니 마침 뜨락에 화판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고있었어. 꽤 너른 뜨락에 백여평쯤 되는 단독주택인데 시내 변두리 산기슭에 붙어있더라. 주위 환경은 제법 아늑했어요. 뜨락을 물들이는 피빛노을이 얼마나 짙던지 섬뜩한 생각마저 들었어요. 푹 젖은 시멘트바닥이 노을빛을 반사했던것 같아. 형수님은 뜨락에서 세탁한 옷을 널고있고 예닐곱살 되는 딸애는 온 마당을 쫒아다니면서 잠자리를 잡고있었지. 바깥문 떼고 들어선 첫 느낌은 아까말데로 짙고도 불안한 유화빛이였어.>>

<<나한테는 얘기 안했었지? 잠간, 과일 좀 깍아오고―.>>

당신은 대구산 큰배를 깍아서 곱게 쪼개 포크로 찍어 건네왔다. 눈에 호기심이 가득 어려였다. 아직도 장난이 가능할까. 나는 얼결에 손가락으로 이마를 눌러주었다. 당신은 곱게 눈을 흘기며 몸을 피했다. 눈귀에 붕어꼬리주름이 잡혀있다. 세월은 살같단다. 우리는 벌써 추억이나 더듬고있을 나이에 들어섰는지 모른다.

<<헌데 웬지 노을빛이 불길해나는것 있지? 빨래줄에 옷을 널던 형수님의 표정에 약간 놀란빛이 어리더군. 키가 훤칠하고 몹씨 여윈 형수님은 속옷을 벗으면 갈비뼈가 아롱거릴것 같았어. 알고보니 페병 앓았던 경력이 있었어. 코피를 쏟으며 악을 써 남경미술대에 갔고 졸업하자 연길 예술학교에 배치받아 교편을 잡게 된거지. 결혼 삼년만에 남편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자 딸애와 홀로 조용히 지내다가 공교롭게도 형의 담당교수가 되였나 봐. 형이 어떤 맘 품고 따라붙었는지 몰라도 사제간에는 제법 부부생활을 해왔었지, 쭉. 형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내였어. 아마 그게 결혼의 빌미가 되것 같아. 첫 상면인데도 벌써 둘의 불행이 예감되더라. 어떻게 말할까? 형수님은 올곧은 충정인데 반해 형은 그 배를 잠시 빌려 탔을뿐이란 생각, 형수님은 한나무에 목을 딱 매버리는 성질이거든. 그래서 우리 와이프도 진수형이라면 진저리를 치군 했었어.>>

와이프를 언급하고 나는 얼핏 눈치를 살폈다. 그랬어? 그랬구나, 당신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그쪽에도 소문 쫙 돌데에, 미대교수와 결혼해서 어떻게 잘나가고있다구. 후에는 리혼을 했구 녀자가 자살시도까지 했다며? 정말이야 그게?>>

<<으응―.>>

나는 당신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스스럼없이 깍지를 꼈다. 옛날 손만 잡으면 나가던 버릇이 은연중 생겨난것, 당신은 눈을 흘겼다. 귀밑을 붉혔다. 손을 가만히 빼간다. 미세한 동작들에서 나는 문득 살얼음이 깨지는것 같은 긴장을 느끼였다.

그날 나는 형네 집을 찾지 말아야 했다. 시멘트바닥 웅뎅이에 고인 피빛노을은 내 마음에 불안한 음영을 던져왔었다. 녀자는 왜 그리 키 크고 말라있을까? 나를 보더니 입을 반쯤 벌린채 시선을 형한테 던졌다. 뜨락에서 잠자리를 잡으며 뛰놀던 계집애가 엎어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저눔의 기집애? 형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면서 붓을 휘익 던졌다. 붓은 화판에 짙은 물감을 찍어놓고 저만큼 날아가 떨어졌다. 재빛, 검정빛 얼룩진 화판에서 나는 기이한 구두 한쌍을 발견했다. 괴이하게 탈려올라간 검정빛은 너펄거리는 바지가랭이와 다리 모양을 그리고있고 구두는 반공을 걷듯 매달려있다. 용트럼질하는 재빛구름우에서 허망하고 아슬하니 보이였다. 비참한 화가의 인생을 모더니즘한 유화였다. 형의 심술궂은 입가에 자조와 릉멸의 빛이 짙게 엉켜갔었다.

<<흥, 그 화가가 누구냐구?― 형은 구들에 누워 다리를 베게우에 뻗었다. 발에 구린내가 물큰 풍겼다― 그 앞서 내가 왜 그런 그림을 그렸냐구 물었어야지. 그 화가는 나두 보지 못했다. 꽤 유명했다더라. 어느날, 그 화가의 구두가 저기 삽작문에 데롱데롱 걸려있었어. 난 그것을 신었지. 내 발에 꼭 맞고 편했고 가죽질도 좋았으니까. 난 그 구두를 신고 삐깟거리며 네거리를 활보했고 유명해질 꿈을 꾸었지. 구두는 내 운명의 수호신같이 느껴졌어. 저 녀잔 아침저녁으로 손이 새까매나도록 매일 구두를 열심히 닦아주었다. 반짝반짝 윤기나게 닦은 구두를 신을때마다 난 저 녀자한테 고마움을 느끼며 감사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난 저 녀자한테서 그 구두가 저거네 아버지신이란걸 알게 되였다. 기막히게두, 영감은 저 구두를 벗어 정히 걸어놓고 목을 매서 유명을 달리했다지뭐니? 영감의 수작들이 모조리 반동독초로 비판받게 된 60년대 후반기에 생긴 일이라더라. 휴, 그래두 난 그 구두를 신고다녔다. 네에미X같이, 그런데 구두는 더는 빛이 나지 않더라. 곰팡이가 끼고 지독한 발냄새가 나구 마귀할매의 주술에 걸린듯 길을 걸어도 구름을 밟듯 허망 느껴지구. 그래도 나는 오늘 이날이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놈의 구두를 신고다녔다. 그리구 며칠전부터 불현듯 저 그림을 그리고싶어지더라. 이젠 아마도 그놈의 구두를 벗어던지게 될가부다. 지지멸렬한 구두는 아마 쓰레통에 들어가 썩게 되고 내 기억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겠지!>>

형의 입에서 풍기는 구린내와 한기에 나는 무식중 몸이 으시시 떨려났다.

저녁에 밥상에 앉아 밥을 먹는 계집애는 자꾸 밥알을 흘렸다. 형수님은 형의 눈치를 살피면서 계집애를 가만가만 나무람했고 형은 시종 찌뿌뚱한 표정을 짓고 술만했다. 미대교수라면 으마으마하련만 형수님은 전전긍긍했다. 딸애를 끼고 살기 때문일까? 나는 형의 위세가 그리 대단한줄 몰랐다.

며달 지나 나는 또 형네 집을 찾아갔다. 차고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잔비 뿌리는 을씨년스런 가을날씨이다. 형은 종갈색 새구두에 회색코드를 입고 밖을 나섰다.

우리는 맥주점에 들어가 명태를 뜯었다. 형은 말을 하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황태가 잔잔히 찢겨졌다. 둘은 라면양념에 맥주를 타 만든 소스에 명태를 찍어먹었다. 황태의 맛은 짭잘하고 고소하고 쫄깃거렸다. 형은 황태와 맥주에 골인한 프로였다. 죽여주지 응? 형은 거듭 입맛을 다졌다. 나는 그때 우울해있었다. 복선녀가 나를 외면했고 나 또한 연변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형이 내 손등을 쳐왔다. 순간 닫아오는 손마다의 끈적한 느낌과 얄궂게 빛나는 눈빛이 나는 싫어졌다. 그래도 나는 뭔가 기대하고있었다.

<<우리 처재가 어때? 복선녀보다 맘에 드니? 그 녀잔 니만큼 문학을 좋아하니 통하는게 있을게다. 윤동주에 완전히 빠져있더라. 인물도 제사촌언니 찜쪄먹게 잘생겼구…건데 임마, 문학이 뭐냐? 니가 이제 연변땅에 뿌리박고 문학을 해서 이름을 내면 얼마 내구 살면 또 얼마나 삐까하게 잘살것 같냐? 고까짓 몇푼 안되는 원고비 받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상황에 아까운 청춘을 거기다 왕창 쏟아붓는 놈이 얼마 부실한줄 아냐? 그래도 글께나 쓴다구 제기분에 빠져 으시대는 님들을 보면 나는 뒤로 자빠져 하늘 우러러 기껏 웃어주고싶다. 좀 착각 말고 살란 말이다. 처자식들 굶기지 말구 식량도 모자라지 않게 준비해놓구 문학을 해도 늦지 않다구. 장가도 못드는 주제에 문학을 해서 성공한 다음 장가 들겠다구, 촌에서 편집부를 찾아왔더란 얘기를 듣고 난 허파가 아파나도록 웃었다. 조선족이 문학해서 부자되였다는 소린 못들었네라. 책 펴내 잘 팔려야 백부 안팍이다. 고만한 인구에 이젠 개혁개방이라 갈수록 돈에 눈이 어두워지니 우리 씨족의 앞날이 펀히 보인다, 편히 보여요. 그러니 남 교양할 생각은 말구 돈이나 꽝꽝 벌어 잘사는게 현명하고 머리있는 놈이네라. 그래두 니놈은 문학을 하겠냐?>>

<<허, 형은 여기선 와 경상도말을 하우? 저쪽에선 연변말을 하더니…내사 이름자 내구 잘살자구 글쓰는게 아니구 심심풀이 하는거라우. 마, 인생이 심심하니까. 참, 형두 그렇지, 그림 그리면 인생소원 성취할수 있겠구려?>>

<<글 쓰기보단 낫다. 그래두 난 때려치울란다.>>

<<워―따, 때려치워유?>>

<<흥, 그래, 잠시 때려치우겠다 잠시. 돈 왕창 번다음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거야. 얼마전에 호텔에 갔다더니 반백의 나그네가 젊은아가씨를 차고 너덜대는것 봤다. 랑랑십팔세라 아가씨의 미모가 삐여나더라. 탱탱한 배살과 젖가슴과 죽여줄 아래것이 상상되더라. 자연의 꽃중에 인체미가 으뜸이요 백미로 일컫지. 철을 맞아 마춤하니 조화된 인육의 률동감과 색채감에 가슴 떨려나지 않겠어? 반백의 나그네와 비교가 안 됐으면 모르갔는데 일단 붙어서 지랄하니 생각이 달라지더라. 네밀, 저런 꽃을 꺾을 나그네의 힘은 어디서 왔을까? 나그네의 X힘이 세기때문일까? 아니면 미모? 허허, 아니지, 그 자식한테는 나한테없는 개를 줘도 먹지 않을 돈이 있기 때문이였지. 돈, 돈, 돈은 결국 나쁜게 아니였어, 너무 좋아지고있어, 우리 배를 불려주고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보배란것을 이제야 깨닳게 되였어. 난 그 보배를 갖고싶다. 진정한 예술을 하기전에 왕창 소유하고싶구나.>>

<<형…>>

나는 말문이 막혔다. 누구한테도 들어보지 못한 횡설수설, 발가벗겨 떼국 자르르 흐르는 마음 내보이는 적라라이고 진리를 타래떡처럼 만들어 입에 쑤셔넣는 그만의 철학같았다. 어찌 저리 돌아버릴수 있단 말인가? 한편 감히 그러는 형이 존경스러워나기도 했다.

<<쩟쩟, 무골충같은 자식, 퀭해진 눈꼴 좀 보지? 넌 왜 마냥 그꼴이냐? 허허.>>

<<형은 이제 배울만큼 배웠구 그림에두 워낙 천부가 있잖어? 이제 노력만 하면 크게 성공하겠는데 왜 딴생각을 하우?>>

<<흐흐, 그래, 니말이 옳을수도 있다. 허나 넌 배고픈게 뭔지 모를거다, 내가 이 땅에 서 어떤 수치를 감수하며 살아왔는지 절대 모르지! 니놈은 부모님들의 품안에서 근심걱정없이 귀하게 자랐겠지만 난 매일 전전긍긍했다. 눈 뜨고 눈꼽 쥐뜯으면 먼저 배안에서 회충들이 꿈틀대며 꼬르륵거렸다. 환장하겠더라. 냉수만 펑펑 퍼마셨다. 그리고 손바닥만한 세집에 들어박혀 하루 점도록 그림을 그렸다. 제길, 사는게 뭐냐? 난 하루에도 몇번이고 그런 물음 물었다. 누구도 답을 주지 않더라. 마, 사내로 태여난바 하곤 성공하고싶었고 좋은주택에서 예쁘고 칠칠한 계집 데리구 남부럽잖게 살구싶더라. 아버지랑 니네식구들이 보란듯 떵떵거리며 말이다. 그게 내 꿈이였다. 진정 사는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 영화(榮華)도 못보시고 아버지랑 형이랑 유명을 달리했으니 너무 섭섭해더라. 세상에 뜨시면서두 니놈은 사람꼴 못할 망종이다, 하구 원망 하셨겠지? 흐흐, 진규 니놈은 내 이 터지는 복장을 어디 알것 같냐 응?>>

나는 형의 눈에 번뜩이는 눈물을 보았다. 입귀 자꾸 실룩거렸다. 쌓이고쌓인 스트레스를 술을 빌어 쏟아냈으리라. 나는 공감이 갔고 당황해났다. 슬쩍 눈을 감은 형의 얼굴은 초췌했다. 마른 얼굴에 경직된 심경이 찌프린 눈확과 날카로운 코끝에 고집스레 노출되여있다.

<<형…>>

내 마음이 형을 불렀다. 칼에 베인듯 가슴이 저려났다.

<<음, 괜찮어, 임마!―형은 눈을 가슴츠레 뜨고 입술을 빨았다.―난 이날이때까지 그리 살아왔으니 내 걱정은 말어라. 오히려 안해주는게 내속이 편하다. 말이 나온김에 마저 얘기해야겠다. 니 형수에 대해― 맘씨, 수준 다 괜찮은 녀자이다. 인생을 순 악으로 살아왔지. 그런데 남편이 죽자 사람 많이 달라지더라. 겁이 많아졌구, 내 눈치 너무 보구…그게 싫어나더라. 떳떳하게 나오면 내 마음이 이토록 모질어지지 않았겠지. 물론 나에게는 세상 둘도 없는 녀자이네라. 어머니같이 따뜻하구 자상하구 엄한 스승이기두 했지. 2학년 학기말, 그러니 여름방학이 다가오던 어느날이였다. 나는 그녀를 찾아 교연실로 갔다. 마침 혼자앉아 비과를 하고있더구나. 난 그녀 뒤로 가서 목을 끌어안았지. 팔로 긴목을 조이며 귀를 잘근잘근 씹어주었지. 흐흐, 홀연 그녀가 몸을 돌려 나를 끌어안더구나. 키스는 그래 시작되였다…후에 우린 결혼했지만 난 그게 잠시인줄 알았다. 그녀도 그걸 느끼고 있더구나. 난 이토록 형편없는 놈이다. 그렇지만, 나에겐 내 생명의 순수미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생각한다. 난 다시 시작하고싶구나.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생을 새로 시작할거다.>>

<<형, 그래두…형수님은…>>

<<자식, 니놈한테 헛말만 주어섬겼구나.>>

형은 갑자기 맥주를 들이키고 벌떡 얼어섰다. 코드자락을 추켜세웠다. 곧 비틀거리며 문을 떼고나갔었다. 밖에는 하냥 비가 치적거리고있었다…

당신의 얼굴에 잔잔한 감동이 실려있다. 왼손에 받쳐진 턱이 주억거린다. 당신의 오른손과 나의 왼손이 어느덧 또 깍지를 끼고있었다. 나는 심술궂게 손가락마디들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기겁을 하며 급히 손을 빼갔었다.

<<그랬구나. 사람은 제뜻대로 살 권리가 있으니 좋다굳다 탓하지 못하겠네. 동정한단 말밖에는…>>

<<그래두 그러면 안돼지, 형수님과는…한번은 찾아갔더니 집에 혼자 누워있더라. 리혼후의 일이다. 들어가도 인기척을 못느끼더구나. 베개에 고개 잔뜩 젖히고 누워있으니 헝크러진 머리에 가리워진 목이 무척 길고 가늘어보이더라. 온몸이 죽은듯 움직이지 않는데 목구멍에서 숨이 넘어가는게 간간히 알리더구나…나올때 형수님은 돈 십원을 내손에 쥐여주더라. 차비하라구, 그리구 형을 너무 미워하지 말라더라. 그리고 돌아서서 조용히 눈굽을 딲는것 보니 속이 물큰, 해나더구나.>>

<<쩟, 쩟, 니 형 만난 녀잔 어쨌든 불쌍하게 되여있구나, 그치?>>

<<응, 건데 왜 날 뚫어지게 쳐다보니?>>

<<너희들은 피가 섞여있으니까.>>

<<임마, 짜아식―…>>

<<바른말을 하면 넌 듣기 싫지? 호호, 참, 내가 왜 널 마중 못갔는지 아니?>>

<<…?>>

<<나, 너 마중 가다 진수오빠를 봤다. 길을 가다 신호등에 걸렸는데 길 저쪽에 차를 세우고 슈퍼마켓으로 들어가는 남잔 분명 니 형이였어. 그 뒤로 녀자 둘이 따라가더라. 한 녀자는 내가 잘아는 녀자이고 한 녀자는 낯선 녀자이니 떠도는 소문의 서울녀자이겠지.>>

<<두 녀자가? 누군데 저쪽은? 그래서?>>

<<아이고, 날이 저물었구나. 밥이나 먹구 얘기하자.>>

당신은 짐짓 두팔 쳐들고 늘씬하게 기지개를 켰다. 괘씸해났으나 참기로 했다.

저물자면 날은 아직 한참은 더 있어야 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