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준희의 연변일기] 연변 충청도마을과 경상도마을을 가다

2009-07-13     동북아신문 기자

 안도현 명월진 신툰촌 “경상도마을” 현재모습

북한의 함경도와 변경을 마주한 연변에는 20세기 초반부터 함경도 지역에서 이주하여 정착한 이주민들의 후예들이 현재 조선족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흑룡강성이나, 요녕성, 연변 이외의 길림성 지역의 많은 조선족들이 경상도 억양을 구사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연변의 조선족들은 대부분 강한 함경도 억양으로 이야기 한다. 그 “사투리”의 차이로, 중국의 조선족들은 스스로를 “남도치(남쪽/현재의 남한에서 이주한 이들)” 또는 “북도치(현재의 북한에서 이주한 이들)”로 구분을 하기도 한다. 함경도 억양이 보편적인 연변에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나는 그 마을을 수소문해서 찾아 나서기로 했다. 내가 방문한 두 마을은 도문시 양수진 정암촌의 “충청도 마을”과 안도시 명월진 신툰촌의 “경상도 마을”이다.  

                                 

도문시 양수진 정암촌  “충청도마을”의 한 농가

"목침만한 감자가 난다", "옥수수는 대들보로 삼아도 되고" , 이주 당시 만주는 꿈의 땅으로 소문나

양수진 정암촌 “충청도 마을”

 도문시 양수진에서 10분 정도 택시를 타고 정암촌에 도착했다. 2003년에 시작된, “새농촌건설”의 혜택을 받아, 이 마을의 집들은 같은 크기, 같은 모양으로 개조되었고 도로는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정암촌은 1938년 충청북도 보은에서 80호의 조선 사람들이 집단 이주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골안”에 위치하고 있어서, “위만시기(이 마을의 1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일제식민지 통치하의 시기를 위만 시기로 명명함)”에는 대부분 조, 옥수수, 수수 등의 밭농사를 지어 “조밥”만 먹었지만, 그 이후에는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마을 형편이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 마을의 1세들은 대부분 충청도가 고향이지만, 한국전쟁으로 한반도가 분단이 되면서, 고향 보은에 있는 친지들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 “이산가족 찾기”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서, 한국에 있는 친척들을 하나둘씩 찾기 시작했고, 한국에서 주최하는 중국동포 1세 고향방문 행사 등을 통해서, 1세 동포 대부분은 고향 충북에 다녀왔다. 특히, 한국에서는 소실된 <청주아리랑>이 이 마을에서는 그대로 구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어, 청주아리랑을 담은 CD가 제작되었고, 그 이후, 정암촌은 충청북도와 밀접한 인적 물적 교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열한 살 때, 충북 보은에서 “만주”로 이주한 박할머니는 아직도 고향을 방문하지 못했다. “회사에서(맥락상 만척 주식회사, 집단이주를 주도했던 일본회사) 중국에 들어가면, 땅도 넓고, 토지도 좋아, 감자는 목침만큼 커서 베고 자도 되고, 옥수수는 대들보를 삼아도 대고, 열콩은 주렁주렁 열린다” 는 말을 듣고 1938년 부모님을 따라 집단이주를 해 왔지만, 땅에는 돌도 많고, 지어진 집도 없어서, 초기 정착에 많은 고생을 했다. 박할머니는 고향의 산과 물, 마을의 풍경들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고향에 한번 가보면 좋은데” 라고 말씀하시면서 진한 아쉬움을 남기셨다. 나는 박할머니로부터 이 마을에서 구전되어 온 <청주아리랑> 전곡을 직접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달라당 달라당 갑사댕기 본때도 안묻어서 사주가  왔네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사주랑은 받아서 무릎에 놓고 한숨만 쉬여도 동남풍된다
시아버지 골난데는 술받아주고 시어머니 골난데는 이 잡아주자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시아버지 죽으면 좋했더니빨래 줄이 끊어지니 또 생각난다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시어머니 죽으면 좋했더니 보리방아 묽어놓니 또 생각나네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시애끼가 죽으면 좋했더니 나무가리 쳐다보니 또 생각나네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서방님이 죽으면 좋했더니 잠자리 들적마다 또 생각난다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타령을 그 누가냈나 이웃집 김도령 내가 냈지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타령이 얼마나 좋은지 밥푸다 말구서 엉덩 춤춘다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경상도 사람은 부지런하고 아끼는 정신 강하다" 다른 마을보다 잘사는 경상도마을


명월진 신툰촌 “경상도마을”

 안도시내에서 20분 이상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도착한 “경상도마을”도 새농촌건설 정책으로 수여되는 보조금을 받아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의 집들로 개조하여 마을은 단정히 정리되어 있었다. 1938년 3월 25일, 경상남도 합천군과 밀양시(현재 행정 지명상)에서 185호가 만주로 집단 이주하여 형성된 이 신툰 마을에는 당시, 60호가 정착했지만, 현재, “불 떼서 연기 나는 집”은 서른여덟 집뿐이다. 이는 1990년 이후, “고향”에 있는 친척들을 찾게 되면서, 한국에서 살고 있거나,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이주민들은 기후가 냉한 “골짜기”의 척박한 땅을 부지런히 일구어, 1970년대 이미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벽돌집을 지었다. 이 마을의 촌장은 “경상도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아끼는 정신이 강하다”고 하면서, 주변의 다른 마을들과 비교해서 일찍부터 더 잘 살게 되었다고 전했다.
 연변사투리와는 판이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이 마을 이주민 1세대 최할아버지는, 20년간 생산대 대장으로 일한 “노간부”이다. 올해 79세인 최할아버지는, 아홉살에 만척주식회사의 집단이주 모집으로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당시 이주의 경로를 생생하게 기억하셨다. “대명이라는 합천의 촌에서, 합천 시내로, 옛날에 작은 택시 같은 거 있어서, 그거 타고, 대구로 나와서, 그날 밤 기차타고, 5-6일 기차타고, 안도까지 와서, 명월진에서 여기로 걸어걸어 들어왔제. 당시, 우리 동네(합천)에서, 못사는 사람들, 토지가 없는 사람들, 남의 집 머슴살이 하던 사람들이 들어왔지만, 그중 ”재주있는 사람(나중에 “협잡군”으로 명명함)도 있었제. 그때 우리가 처음에 와서 돈이 없으니까, 만척에서 양식도 주고, 미역, 감자, 무시짠지, 좁쌀도 줬제. 우리가 나중에 벌어서 갚는 걸로 하고“. 귀가 어두워 나의 질문을 잘 알아듣지 못하시는 할아버지에게, 이 마을의 촌장님은, 다시 더 큰 목소리로 질문을 반복해주셨고, 나는 그 ”통역“ 덕분에, 최할아버지의 옛 이야기와 지나간 사진첩들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경상도마을 이주민 1세대 최씨 할아버지 사진첩에는

경상도마을 초창기 전경을 담은 사진이 있다.

중국에서의 “70년”

1938년에 집단이주하여 형성된 이 “충청도마을”과 “경상도마을”의 주민들은 연변에서 “특이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람들로 회자된다. 이들은 “목침만한 감자”가 난다는 만주에 대한 소문을 듣고, 먼 길을 떠나와서, 땅을 일구고, 정착하면서, 중국식 사회주의를 경험하면서 70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조선 땅에서 살았던 “10년 어치의 기억”은 여전히 박할머니와 최할아버지를, 충북 보은에, 경남 합천에 머물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충청도 사투리로, 경상도 사투리로, 그 기억들을 이야기 한다. 그들은 여기, 중국 땅에서, “만주땅의 꿈”을 품고 70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젋고 건강한 이들의 자녀들, 손녀 손자들은 연변사투리가 섞인 충청도, 경상도 말을 하면서, “한국 땅의 꿈”을 안고 한국으로 점차 떠나게 되면서, 이 마을의 “굴뚝에서 연기 나는 집”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조선에서 만주로, 다시 70년뒤, 중국에서 한국으로의 이주의 순환과 이주의 역설 속에서, 이 마을 조선족들의 기억은 다시 쓰여지고, 읽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권준희 : 미국 듀크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박사과정 한국인 유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