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취업제는 우리 가정의 “은인” (김국화 수기)

2009-06-19     [편집]본지 기자

지금의 저를 보면서 가끔 전 참 행운아라는 생각이 듭니다. 방문취업제가 아니였더라면, 한국정부에서 이렇게 한국에 일가친척 하나 없는 우리에게 이런 특혜를 마려해 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 지금도 가난한 생활난에 허덕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중국 길림성 화룡시의 한 자그마한 산골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아들과 이제 겨우 학교에 입학을 한 귀여운 딸, 그리고 친정어머니 같은 시어머님을 모시고 부지런한 남편과 함께 생활형편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지만 마음만은 항상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우리 가정에 불행이 시작된 건 바로 남편이 이웃집 이사짐을 날라주다가 사고로 허리를 다치고 난 뒤부터였습니다. 집안의 기둥이였던 남편이 사고로 병원에 몇 개월을 누워있다 보니 저는 갑자기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고 이런 아들을 보는 시어머님은 긴 한숨만 쉬였습니다. 시골에서 수입이 한계가 있는 만큼 저 혼자 아무리 죽도록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나기는커녕 빚만 늘어났습니다. 생각할수록 눈앞이 캄캄해지고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몰래 뒷산에 올라가 통곡한적이 한두번 아니었으며 그냥 죽어버릴까도 생각하다가 이제 저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 어린 두 자식과 몸이 불편한 남편 그리고 연로하신 시어머님 생각에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집으로 내려오곤 했습니다.

남들은 다들 대도시로, 해외로 또는 친척방문으로 한국에 돈벌이를 떠나지만 수중에 돈 한푼 없고 한국에 일가친척 하나 없는 저는 한국방문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동네 이집 저집에서 모두가 한국으로 간다고 야단법석을 떨지만 우리가족에게는 먼 나라 얘기였습니다. 어린것들이 소풍갈때도 도시락 하나 변변치 못하게 해준 것이 늘 마음이 아팠고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도시에 아파트를 샀다며 도시학교로 전학가는 애들을 보고 기가 죽어 돌아오는 애들을 볼 때면 코끝이 찡해지며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일찍 철이든 애들이 오히려 저를 위로하였습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우리가 커서 꼭 성공해 아버지 어머니에게 아파트도 사주고 승용차도 사드릴께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공부도 잘 하고 글쓰기를 좋아했던 저는 어려운 가정형편에 대학의 꿈을 이루지 못한고 포기한 것이 늘 후회되어 자식만큼은 꼭 대학공부까지 시키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던 중 무연고동포도 한국어 시험을 쳐서 합격되면 한국으로 갈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어 시험을 보려면 학습반도 다녀야 하고, 인터넷으로 시험신청도 해야 되는데 그것도 몇천원이란 금액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시 실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빌린 돈 때문에 더 이상 어디가서 손 내밀 곳도 없는 저에게 몇천원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신문을 통해 이것이 다 브로커들의 돈벌이 수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시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길림신문을 통해 돈 몇 푼 들이지 않고 시험자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연고동포 방문취업제가 실시되기 전에는 저는 스스로 인생이 참 기구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행운이 저에게 찾아 올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습니다. 남들은 많은 돈을 들여가면서도 얻지 못하는 시험자격을 얻게 되자 저는 어린애 마냥 들뜬 마음에 밤샘하며 한국어 공부를 하여 시험도 무난히 통과하게 되었고 더구나 전산추첨에서도 운 좋게 단 한번에 당첨되었습니다. 당첨발표 있는 날 저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자신을 꼬집어 보기도 했습니다. 사실이 확인 되자 저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어 엉엉 소리 내어 어린애마냥 울었습니다. 이런 저를 보며 남편도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이렇게 한국에 입국하여 취업교육을 이수하고 처음으로 강남의 한 식당에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한국말을 잘 몰라서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영어를 많이 쓰는 한국말은 우리가 중국에서 하던 말하고는 전혀 달랐습니다. 처음엔 소주도 못 알아들어 손님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는 손님이 뭘 갖다 달라고 하면 아는 척 “네!” 대답을 하고는 잘 기억 했다가 한국 언니들한테 물어보고 메모해 두었다가 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한 끝에 2~3개월 지나자 저도 제법 한국말도 잘 할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감도 생겼으며 일에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보며 타국에 와서 너무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다면서 사장님도 저를 친동생처럼 대해 주었습니다. 가끔 오후 쉬는 시간에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저의 가정사를 들을 때면 사장님도 가끔 눈시울을 붉히며 “귀국할 때까지 자리 옮기지 말고 우리 집에서 일을 해라”고 하면서 “이렇게 열심히 하다보면 꼭 좋은 날이 올거야” 하며 저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러다 3년 만기 되어 귀국하여 보니 어느새 훌쩍 큰 애들이 좋아라 두 팔에 매달렸고 남편과 시어머니도 환한 얼굴로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이런 우리 가족을 바라보며 저는 우리 동포들에게 특혜로 방문취업 자격을 준 고국에 대한 고마움을 또 한번 새롭게 느꼈으며 지난 2월 재입국을 한 저는 또 다시 그 음식점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주방장까지 되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방문취업제로 입국하는 동포들에게 한가지 부탁드리고 실은 것은 우월한 조건과 월급이 높은 일자리만 찾느라 이곳저곳 다니며 일자리 없다고 아우성 말고 적당한 일자리를 찾아 열심히 노력한다면 언제든지 인정을 받고 노력한 만큼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계의 경제불황으로 한국도 치명타를 입은 만큼 처음부터 자기 마음에 꼭 드는 일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그 대가가 따르는 법입니다.

요즘 뉴스를 통해 외국인근로자들과 재한동포사회에 폭력조직이 활개치고 도박 등으로 패가망신하는 사례를 볼 때면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자국에서 생활형편이 어려워 한국 땅에 힘들게 돈 벌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기억 못하고 수중에 돈이라도 좀 있으니 일하기 싫어 공돈이나 벌어보려고 도박판을 벌리는 등 부정행위를 볼 때면 내국인들 보기에 창피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방문취업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5년 뿐입니다. 또 다시 ‘불법체류자’라는 악명을 쓰지 말고 이 기간 동안 다들 열심히 노력하여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 동포들에게 방문취업제라는 특혜를 준 고국에 감사드리며 이번 무연고동포를 위한 전산추첨을 통하여 고국을 방문한 동포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가난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꿈을 꼭 이루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