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의 오래된 비밀-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권준희의 연변일기 13]

2009-06-19     [편집]본지 기자

난 여전히 연변의 지리와 지역 곳곳에 스며든 이 지역 지방사(地方史)에 대하여 익숙하지 않지만, 몇일 전 한국에서 방문한 한 친구의 여행 가이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연변지역의 여러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적당한 “관광지”를 수소문 해 본 후, 짧은 시간 내 연변의 지리적 특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을 두만강을 보기 위해서 도문으로 향했다. 중국과 조선반도(특히, 국가로서의 북한)는 두만강이라는 자연적 경계를 근거로 국경을 인접하고 있어, 도문의 변경 근처 곳곳에서는 중국의 변방 부대(국경 수비대)들을 발견할 수 있다(북한 부대는 중국 쪽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다). 또한, 입장권(연변말로 문표(門標)) 20원(현재 환율, 한화 약 4천원에 해당)을 내게 되면, 북한 쪽의 남양시와 연변의 도문시를 연결하는 다리위의 “변계선” 까지 도달 할 수 있다. 즉, 변방 부대가 보초를 선 풍경과 변계선(가시적 변경선)에 대한 실제 체험은 연변의 중요한 “관광 상품”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난 이 도문의 변계선 “관광지역”을 세 번째 방문하면서, 두만강 폭 만큼의 가까움과, 쉽게 가 닿을 수 없는 북한 마을의 풍경 그 자체가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지척의 멀고도 가까운 조선반도로부터 월경(越境)한 조선족들은 지난 20세기의 정치적 경제적 소용돌이 속에서(식민지-해방-한국전쟁-문화혁명-개혁개방) 그들의 “고향”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 왔을까.

사례 1

1980년대 초 개혁개방의 기운이 연변에도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흑백 텔레비전을 가진 집들이 하나 둘 등장하게 되고, 라디오 청취도 암암리에 점차 확산 되면서, 우리 가족들도 조금씩 “바깥”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한국 라디오를 몰래 몰래 듣던 사람들은, 한국에서 가족을 찾았네, 그들을 만났네 하면서, 금지된 “고향”, 한국과 그곳의 친지들과 조우하기 시작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중국에 살던 다른 형제들은 모두 조선반도로 돌아갔지만 내 아버지는 차일피일 귀국(조선반도로의 귀향)을 미루다가 중국에 남게 되었다. 그 이후 40년 이상, 아버지는 형제들과의 연락이 두절된 채로 지내면서도, 한국에 형제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일체 하지 않으셨다. 한국에 친척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특무(일종의 간첩업무)”로 몰릴(의심 받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셨던 것이다. 그런데, 1985년 어느날, 한국으로부터 아버지의 해방 전 옛 주소로 편지 한통이 돌고 돌고 돌아 연변 우리집에 도착하게 되었다. 한국의 고모로부터 온 편지였다.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가 너무 놀라실까봐, 우리는 이 사실을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가, 결국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한국에서 편지가 왔다는 그 사실, 한국에 친 고모 있다는 충격적인 상황에, 우리 가족은 모두 덜덜 떨면서 두려워 했다. 하지만, 우리집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온 편지를 받고, 가족 상봉을 하는 이웃들을 여럿 보면서, 그 공포는 점차 사그라들었다. 1989년, 고모가 홍콩을 경유해서, 중국을 방문하게 되면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한국 가족”들과의 인간적인 관계가 점차 성립되게 시작한 것이다.

사례 2

나는 용정의 변경마을 삼합과 마주한 조선의 유선이라는 곳에서 7살 때 부모를 따라 중국에 왔다. 1930년대 당시 조선에서 먹고 살기 어려워서, 우리 부모는 만주 땅(맥락상, 지금의 연변지역을 가리키는 듯함)에 가서 탄광일도 하고, 농사도 지으면서, 만주와 조선을 왔다 갔다 했다. 난 그동안 조선에서 아매, 아바이(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우리 부모가 만주에 가서 농사를 짓기로 결심하면서, 용정 삼합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난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내가 학교를 갈 때 즈음, 해방 나고, 정치적으로 정신없이 시끄럽기도 했고, 배운 사람들에 대해서, 좀 감시 단속을 하기도 하고 해서, 공부를 더 하지 않고 농민으로 살게 되었다. 초중(중학교)을 졸업한 열여섯 살 되던 해, 바로 공산당에 입당해서, 혁명사업에 열심히 참여했다. 농민 간부였지. 하지만, 난 공산당활동을 하면서, 내가 조선의 유선 출신이며, 조선에 친척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절대 말하지 않았다. 난, 철저히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에, 조선과의 관계를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 고향은 두만강만 바로 건너면 나오는 첫 마을이지만, 난 팔십 평생, 지금까지 한 번도 조선에 가본 적이 없다.

이 두 사례는 남한에서 중국으로 또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첫 세대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은 20세기 반복되었던 역사의 단절과 접합 속에서, 정치적, 경제적 생존을 위해서 변경을 넘나들었던 조선족들의 경험이 어떻게 개인적인 비밀로, 상처로, 또는 그리움으로 기억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이 “오래된 비밀”들이 밝혀지면서,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친족관계들이 회복되고, 조선반도와의 문화적인 교우는 가속화되었다(때로는, 이러한 친족관계가 친척 초청 비자발급을 위한 근거로, 또는 비자 발급 시 금전적인 거래를 위한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때로는, 북한장사를 위한 시장 기지로도 활용되었다). 대부분 조선족들은 “중국공민”으로서의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월경(越境)” 또는 “과경(過境)” 민족으로서의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최근 연구들은 조선반도와 급격하게 “단절”을 이룬 “중국공민”의 정체성만을 다루지 않는다. 즉, 변경을 넘어 이주 정착한 조선족들이 다양한 층위에서 조선반도와 어떻게 다시 연결되고, 그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변경에서의 “오래된 비밀”들이 밝혀진 이후, 가속화된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하에서 연변의 조선족들은 소수민족 지구의 주민으로서의 지역적 한계를 넘어, 조선반도(남-북한)로, 청도로, 북경으로, 상해로, 그리고 저 바다 너머 아주 먼 어딘가로, 접속을 계속 시도하고 있다.

권준희 : 듀크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박사과정 한국인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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