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드림 20년, 희로애락의 연장선에서

흑룡강신문·한국판창간 특별기획(김명환 기자)

2009-06-19     [편집]본지 기자

합법, 불법체류자 합치면 40만명 육박
구로, 대림, 가리봉 일대 ‘동포타운’ 지목
中연해지구 마련 부동산가치 수백억위안 

양호한 이미지수립 위한 노력도 가시화
동포정책관련의 혼선으로 향방 불확실
훈훈하던 가슴 싸늘하게 식어가는 작금

‘현재 90일 이상 장기체류 등록조선족은 36만2,920명, 불법체류신분은 2만7,207명...’이는 한국 법무부가 금년 1월 발표한 《2008도 출입국 외국인 정책통계》에서 밝혀진 수자이다. 합법, 불법체류자를 합치면 40만에 육박, 중국 전체 조선족을 통상 200만으로 추산할 때 재한 동포가 20%를 차지, 말 그대로 놀라운 수자가 아닐 수 없다.

 

냉전의 기류를 가르고 구 소련과 중국을 망라해 동서진영이 함께하여 미증유의 성황을 이룬 88‘서울 올림픽대회는 한국을 만방에 알리는 대잔치였고 수십년간 조선족동포들에게 아득히 ‘먼 나라’로만 여겨졌던 고국은 하루아침 황홀한 존재로 안겨왔다. 이와 동시 고국의 반전한 모습과 '한강기적'이 세상에 알려지자 지난 90년대 초, 홍콩을 거쳐야 가능했던 친지방문 물꼬가 트였다.

처음 약장사로부터 시작된 이들의 한국행은 가히 노다지판에 비유할 만 했다. 당시 건설현장, 음식점에서 한달 노임이 중국에서의 3~5년의 소득에 해당되었으니 말이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서 진짜와 가짜 비즈니스, 친지방문, 위장결혼을 망라한 조선족의 한국행은 붐을 이루어 남성은 대부분 건설현장, 여성은 식당을 위주로 한 서비스업종에 몰리고 있었다.

당시 규모를 자랑하는 구로공단 건설작업에 대량의 인력이 필요했고 주변일대에 값싼 쪽방이 많아 조선족들이 줄지어 이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서울의 구로, 대림, 가리봉 등 일대는 명실공히 ‘동포타운’으로 지목되고 있으며 간곳마다 중국 글과 한글간판이 엇갈려 연길의 어느 모퉁이를 방불케 하고 있다.

지난 10여년간 인천 영종도 신공항, 새만금 개척지, 청계천 개발, 서울 외곽순환도로, 인천 송도신도시개발 등 수천억원에 달하는 공사로부터 전국의 헤아릴 수 없는 크고 작은 현장마다에 중국동포의 땀이 배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고국에서 동포들은 땀 흘린 만큼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흑룡강성 녕안시 모 촌의 현재 한국체류자가 100여명, 그중 10년 이상 경력자만 해도 40여명 되는바 이들 중 근 30명이 위해,청도,상해 등지에 한 채 혹은 두 채의 아파트를 샀다고 한다.2002년 고향 사람 김씨가 먼저 청도에 집을 사 임대하자 너도나도 따라 나섰다는 얘기다.

연변의 왕청에서 왔다는 정씨는 현재 한국에 체류중인 친척이 근 30명 되는데 지난 구정 함께 모인 자리에서 두루 세어보니 이들이 연해지구에 산 아파트가 16채나 된다고 했다.

연변의 왕청에서 왔다는 정씨는 현재 한국에 체류중인 친척이 근 30명 되는데 지난 구정 함께 모인 자리에서 두루 세어보니 이들이 연해지구에 산 아파트가 16채나 된다고 했다.

 

1994년 친척의 초청으로 들어왔다는 50대 후반의 하얼빈시 박모 내외는 97년 금융위기를 경험했으므로 “후각”이 예민해져 2002년과 2006년 선후로 베이징에 아파트 한 채와 가게건물을 사서 임대하였는데 이미 20여만위안 이득을 챙기었다고 한다.

지난 20년간 한국행을 택한 동포들 가운데 20~30%는 자녀를 공부시키는 외 중국 연해지구나 대도시에 부동산을 마련했는바 그 가치를 따지면 인민폐 수백억위안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리고 ‘녹청물산’(대표 이동국), ‘연길냉면’(대표 김성학)등 중한무역, 서비스업에서 튼튼한 기반을 마련해가는 동포 성공사례도 허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원인으로 조선족 동포와 한국인, 한국사회간에는 미묘한 갈등과 불신의 벽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이란 고국이 있었기에 동포들은 국경을 나들며 꿈에 도전할 기회가 있었고 오늘날 중국 연해지구 전역에 진출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다져갈 엄두를 내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한국내 동포사회 ‘산 증인’으로 불리며 이들의 권익신장에 다년간 노력을 몰부어 온 한중경제친선교류협회 김일남 상임이사(흑룡강 영안 출신)의 말이다.

중한수교 후 조선족은 여타 민족으로부터 선망의 눈길이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결코 화려한 장만이 펼쳐진 게 아니었다.

연변 화룡에서 왔다는 박모씨에 따르면 일찍 친지방문, 노무송출수속을 해준다는 브로커에 속아 3년간 도합 7만위안 밀어 넣었다 한다. 나중에 집을 팔고 친척의 돈을 꿔 밀항으로 목적을 달성, 경남 어느 시골의 농장에서 여러 해 ‘숨어 살다’ 자진신고 기회에 출국했다가 들어왔다고 한다. 지난 90년대 후반, 이처럼 가지가지 경로에 명목에 목숨을 건 밀항까지 택하여 5만-7만위안 지어 10만여만 위안을 대가를 치르고 나온 사람도 적지 않은 현실이며 불법체류자로 전전하다 보니 빚을 갚는 데만 2~3년이 걸린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1996년 말,흑룡강성 연수,상지,목란 일대의 10여명은 어느 브로커의 알선으로 남방 연해도시항구를 거쳐 밀항한다고 가족에 전하고는 소식이 두절되었다. 한국에 있는 친척들도 일행의 소식을 여태 모르고 있으니 모두들 수중고혼이 되었다는 결론, 그동안 가족들은 가슴이 재가 되었다...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2002년 이후 지난해까지 위장결혼으로 재판받은 사례가 만여 명에 달하며 그중 조선족여성이 다수를 차지해 현재 무려 6천여명이 무국적자로 추산되며, 적지 않게는 안마시술소, 노래방도우미로 변신하여 불법취업, 색정봉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부부중 일방이 나온 경우 처음은 가족에 돈을 부치다가 어느 날 아내나 남편의 ‘염문’이 들려오면 대부분 송금이 중단된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이런저런 명목의 한 고향 사람 혹은 동창생 모임에서 남녀가 의기상투하여 “임시배필”로 무어지면 집에 있는 가족에 관심이 점차 식어 자식 학비마저 단념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경력 동포들 가운데 가정해체란 비극을 자초한 비례를 20%혹은 그 이상으로 추산하는 사람도 있다.

마작판, 경마장에 취미를 붙여 땀 흘려 벌어서는 그대로 밀어 넣다보니 10년이 넘도록 빈털터리 신세로 쪽방에 사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밖에 사이코패스의 희생양이 되었거나 비명횡사한 사례도 너무나 많다.

연쇄살인범 강호순(38)에 의해 숨지고 시신이 경기도 화성시 어느 골프장에 매장되었다는 김모(당시 37세)여성은 아직 유골마저 찾지 못하였다.

노래방 도우미로 있던 동포여성 K씨는 성폭행을 피해 달아나다 3층에서 떨어져 중태에 빠지고 말았다. 금년 초 한 남성의 ‘묻지만 범죄’행각으로 서울의 모 고시원에서 생활하던 3명의 동포 여성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2008년 1월의 이천 냉동창고 화재로 조선족 동포 10여 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고국을 찾은 동포들이 처음부터 돈을 좀 벌어 잘 살아보려는 목적이었지만 수십년간 부동한 체제, 이념과 문화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서 물 우에 뜬 기름처럼 융합이 쉽지 않았으며 노동현장을 망라해 간곳마다 차별화된 취급을 받기가 십상이었다.

 

1996년 페스카마호 선상살인사건이 발생하자 사고경위와 진상에 대한 객관적인 규명이 결여된 언론의 편파보도, 부정시각의 집중조명이 시작되어 동포사회 전반의 위상이 하강하기 시작, 불법체류자의증가로 이미지는 그야말로 얼룩 투성이였다.

게다가 정부의 동포관련 정책이 어수선하여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은 억울함을 당해도 호소할 곳이 없었다. 건설현장, 음식점들에서 불법체류자란 딱지가 붙어 악덕업주들은 수개월 혹은 반년 이상 노임 체불을 밥 먹듯 하였으며 나중에 경찰과 내통하여 이들을 쫒아나는 사례마저 속출하였다.

기자가 금년 구정을 전후하여 한국 체류중인 흑룡강의 오상, 연수, 아성 등지 조선족 동포 10여명으로부터 요해한데 의하면 고향 사람, 친척들이 지난 90년대초부터 동포관련법이 시행되기 전까지의 10여년간 건설현장을 망라해 여러 업종에서 수백만원에 달하는 임금을 받지 못한 사람이 수십 명으로 추산되었다.

지난 몇 해간 한국정부의 동포관련 정책이 잇달아 출범하며 자진신고에 의한 재입국제도, 방문취업제와 동포관련정책을 부단히 보강하여 합법체류자가 늘어나다 보니 이들의 자세와 사회적 지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 양호한 이미지수립을 위한 노력도 가시화되고 있다.

한중경제친선교류협회,귀한동포연합총회,재한동포연합총회 등 단체가 연이어 발족하여 동포들의 권익신장과 더불어 각자 부동한 구심점 역할을 발휘하고 있으며 구정, 단오, 추석 등 명절이 오면 노래자랑, 축구경기를 조직하여 활기 넘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07년 5월, 한국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주최한 ‘재한조선족동포대잔치'는 만여 명이 모인 성황을 이루었으며 중국음식문화박람회와 음식체험관, 노래자랑, 풍물놀이 등 다양한 내용으로 펼쳐졌다.

금년 5월3일,‘세계노동자’의 날을 맞아 조선족동포와 시민들 간의 화합과 교류를 도모한다는 취지하에 10여개 축구팀이 서울시 세 개 체육장에서 펼친 ‘한마음 축구대회’는 동포사회뿐 아니라 지자체와 많은 시민단체들로부터 열띤 호응을 받았다.

 

재작년 말, 충남 태안앞바다 기름유출사고 발생 후 흑룡강조선족모임,귀한동포연합총회 등 여러 단체들에서 다투어 기름제거작업에 동참하여 지자체와 자원봉사자들로부터 ‘피는 물보다 짙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는 10월에는 한국경제친선교류협회의 주최로 서울의 장충체육관에서 수만명 동포가 참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추석대잔캄를 펼치게 된다고 한다.

이 역시 불황속에 고전하는 동포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힘을 안겨주는 마당으로 기대된다.

 

조선족동포들이 이처럼 낙천적인 모습으로 이미지수립과 개선에 노력을 몰 붓고 있지만 고국에서 이들이 설 자리는 여전히 한계가 있고 갈 길은 순탄치만 않은 현실이다.

지난해 새 정부출범이 미국 발 금융위기와 맞물리자 노동시장이 위축되고 국내 실업자가 늘어난다는 등의 이유로 동포관련 정책이 일련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현 정부는 4대강 살리기 등 뉴딜정책 발표 중 내국인 고용 기회의 확대를 위해 조선족을 망라한 재외동포의 건설업 관련 취업을 제한하는 방안을 출범하기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수도권 위주의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조선족동포는 근 20만명으로 추산, 쿼터제 명목의 취업허가제를 실시하면 상당부분 동포들이 현장을 떠나야 할 전망이다.

 

또 5년 유효기간 방문취업비자는 만 3년이면 출국했다가 다시 들어와야 하는데 종전의 1개월 체류 후 가능했던 재입국이 1년으로 연장되었다는 결정이 나와 많은 동포들 가슴에 짙은 그늘이 드리우고 있다. 친지초청문턱도 예고 없이 높아 가고 있으니 1년 후의 상황이 어떻게 번져갈지도 커다란 의문이다.

그리고 월세방이 대부분 2년으로 계약이 되어 귀국일자와 월세방 임대 기간이 일치하지 않으니 중도에 귀국하려면 300~500만원 보증금을 받지 못하는 문제들에 봉착한다.

하여 적지 않은 사람은 울며 겨자 먹기로 최근 입국자나 거처가 변변치 못한 사람에게 출국기간에도 자기가 월세를 절반 혹은 그 이상 부담하는 조건으로 집을 봐달라며 청탁하고 있다.

그보다 다년간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여 업주와 상호신뢰관계를 쌓고 임금이 보장되는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게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이라 한다.

한편 동포들의 발길이 많이 닿는 출입국사무소, 그리고 관련부처 직원들의 말투나 눈길부터 차갑게 변해가고 있다는 얘기, 지난 몇 해간 훈훈하게 더워나던 이들의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는 작금이다.

‘조선족 동포들이 건설현장에 몰려 내국인의 일자리를 잠식했다고 하지만 만약 이들이 하루아침에 빠져나간다면 심각한 상황에 봉착할 수도 있습니다. 인건비 등 요인으로 아파트값이 인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구요. 사실 적지 않은 한국인들은 직장을 잃고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건설현장을 망라하여 3D직종을 기피하는 경향이 엄중한 편입니다.’

현대건설에서 근30년 근무했다는 한국인 유씨의 말이다.

코리안 드림 20년, 고전하는 동포들에게 내일의 희망과 더불어 가지가지 충격이 엇갈리는 삶의 연장선이 아니겠는가.

제공 = 흑룡강신문 김명환 서울 특파원 j_mh8@hotmail.com  / ' 흑룡강신문·한국판창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