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고동포 방문취업제 한국어능력시험 보는 날
[권준희의 연변일기 11]
“우리 아들도 한국에 연수생으로 갔지만, 아무리 환율이 떨어졌고, 한국에서 우리가 아무리 기시(무시, 차별) 당하고, 일자리 구하기 어렵다고 해도, 여기 있는 것 보다 낫제”
4월 18일
연변에서는 대규모의 인구이동이 일어났다. 가깝게는 연변의 농촌에서, 연길로, 멀게는, 장춘으로, 소주로, 연변의 조선족 동포들은 “집체로(단체로)” 또는 “개인으로(개별적으로)” 길을 떠났다. 왜냐하면, “한국어 능력시험”이 내일 실시되기 때문이다. 시험 동록시, 본인이나 시험을 등록해주었던 회사의 민첩한 정도에 따라서, 시험장소가 결정되기 때문에, 수험자 당사자가 시험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조선족 동포들은 시험 등록했던 날을 일종의 “등록 전쟁”으로 회상하곤 한다.
수많은 인원들이 비슷한 시간대에 시험등록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하기 때문에, 등록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많아, 시험장소가 어디든, 등록이 되어 배당받은 것 자체에 만족을 해야 한다. 하지만, 막상 여행도 아닌 먼 여행을 떠날 날이 되니, 시간과 비용은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수험자”들은 몇일 전부터 떠날 채비를 했다.
4월19일
서울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정씨 아주머니가 용정 농촌에 있는 동생네 집에서 “디비(두부)”를 하려 하는데, 같이 먹으러 가자고 전화가 왔다. 한국에서 먹었던 두부보다 훨씬 부드럽고 고소한 연변 두부를 좋아하게 된 나는, 아주머니의 전화가 오자 말자, 버스에 올라탔다. 연길-용정간은 버스들이 10분마다 떠나고, 연길 시외 버스터미널 앞에는 “총알택시”들이 줄을 서 있지만, 용정시내에서 그 농촌마을로 들어가는 버스는 하루에도 몇 대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버스는 빈 좌석이 없을 때까지 마지막 손님을 기다리다가 만원이 되자 떠났다. 정씨 아주머니의 동생은 우리(정씨아주머니와 나)가 도착하자, 아침부터 불려 두었던 콩을 갈기 시작했다. 두부를 만들고, 먹고, 설거지를 할 때까지 내내, 장춘에 시험 보러 간 남편이, 이제는 장춘에 도착했겠지, 이제는 점심을 먹었겠지, 이제는 시험장에 들어갔겠지, 남편의 장춘시간과 본인의 용정 시간을 계속 일치시키고 있었다.
정씨 아주머니의 동생은 아주 “역빠르고(영리하고)”, 열정적인 농민이었다. 농촌에서, 농민으로만 평생 산 이 동생은, 어렸을 때의 가난한 생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일 해왔다. “내가 이런 농촌 골안에 살아도, 우리집은 우리 동네에서 기중 괜찮은 편이제. 나는 언제나 해뜨기 전, 남들 밭 갈기 전에 일하러 나가고, 해 떨어지고, 남들 다 집에 간 다음까지 일하다가 들어오제. 남들 한국 간다고 하면, 그 밭도 우리가 부치고.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온통 ”일,일,일“, 꼴똑(가득), 일 생각 뿐이제”. 1983년, “호도거리(집단농업에서 개별농가 농업으로의 전환)”가 시작되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농가 간 소득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본 동력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한국 갔다 온 집”을 결코 능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 아들도 한국에 연수생으로 갔지만, 아무리 환율이 떨어졌고, 한국에서 우리가 아무리 기시(무시, 차별) 당하고, 일자리 구하기 어렵다고 해도, 여기 있는 것 보다 낫제” 라고 하면서, 이 동생은 1년치 농가수입과 한국 갔을 때의 가상수입을 비교하면서, “한국행”의 우위들을 조목조목 짚어 내었다.
이 동생도 작년에 “한국어시험”을 보았지만, “당첨”되지 않았다. “이 한국 손님은 그 멀리서 여기까지 오는데, 나는 왜 그 잘난 한국에 가는 게 이렇게 못가냐, 나 좀 한국에 보내주쇼”라고 농반진반으로 이야기 했다. 한국에서는 “경제위기”를 계기로 올해 방문취업제로 입국인원을 제한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먼 길을 떠나 “입시”를 마친 조선족 동포들은 또 마냥 기다리게 되었다. 하지만, 농민 부부 중 한명이 한국행을 선택하게 되면, 협업에 기초하고 있는 농사일 자체를 그만두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바라던 한국행이 결정된다고 해도, 걱정이다.
3년 기한으로 한국에 연수생으로 갔던 아들이 돌아와도 마땅히 할 일이 없을테니, 걱정이다. “편한 백성(농사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 농민)”이 되고 싶은 맘은 굴뚝같지만, 연변의 도시로 덜컥 나가서 도시민으로 사는 것도 걱정이다. 고마운 봄비가 내린 후, 정씨 아주머니의 동생은 내일부터 밭갈이를 시작하고, 씨앗을 뿌릴 계획이다.
막연하게 한국행을 간절히 기다리면서도, 다시, 농사일에 대한 구상으로 머릿속은 “꼴똑” 하다. 언제 한국으로 “불시엽 떠날지 모르지만.
권준희 : 듀크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박사과정 한국인 유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