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류수(리동렬 장편소설 연재 16)
겨울이 찾아왔다. 허허넓은 대지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거위털같은 눈송이가 산과 들과 마을에 찾아내리는것을 보면 그 자리에 하염없이 서있고싶다. 온 얼굴을 덮으면서 새까맣게 쏟아져내리다가 급기야 흰동전잎같이 커져오는 눈, 눈, 부드럽고 섬뜩한 느낌과 맛이 그리 좋을수 있을까. 이제 하루 이틀새로 급기야 면도칼같은 찬바람이 회오리칠것이다. 눈보라는 대지를 꽁꽁 얼구며 승냥이처럼 기승을 부릴것이다. 전선줄을 애처롭게 울리며 흰갈기 세우고 사납게 울부짖는 바람소리를 듣는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그날 내가 본것은 모진 바람앞에 선 너였다. 논에서 뒤걸음질을 치며 발자국을 내고있었다. 강에서 마을까지 그렇게 가다가 넘어진채로 누워있었다. 못본척할수 없다. 널 안고서 선녀네집으로 달려갔다. 문이 잠기지 않은 빈집이다. 눈을 한줌 뭉쳐서 너의 언발에 급히 부벼댔다. 넌 목석같이 내 손만 보고있었다. 이상하게 우리 집 식구들은 널 미워하지 않았다. 너도 인애와 예전처럼 잘다녔고 나만 피할뿐이였다.
나는 가슴을 헤치고 언발을 끌어다 녹여주었다. 곱게 잘생긴 두 발이 얼음같이 찼다. 차츰 온기를 찾아갔다. 피가 돌자 코방울을 벌름거렸다. 얼어 벌거죽죽해진 뺨에 이슬이 맺히고있다. 자식, 못났군. 어지간이 성숙된 눈빛이 더 무서워졌다. 가여워났다. 뭘했느냐고 물었다. 너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일어나 내 목을 끌어안았다. 달아오른 입김이 볼깃에 쏘여왔다.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제법 복숭아만한 한쌍이 가슴에 야릇하게 맞혀왔다. 돌기된 너의 성을 나는 처음 알았다. 나이 차 겨우 다섯살이란 생각이 났다. 그래도 앤데, 아직은? 내 눈에 넌 어디까지나 비린내나는 계집애요, 소녀였다.
“오빠, 고마워.”
너는 목에서 손을 풀었다.
“오빠 무릎을 베고 좀 자도 괜찮어?”
눈을 치뜨면서 묻는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나의 무릎을 베고 누워왔다. 두 다리 뻗고 두 팔을 가슴에 얹고 한시름 놓았다는듯 눈을 감았다. 소녀와 녀인 사이에서 성숙을 꿈꾸는 얼굴에 이브의 호기심이 짙게 어려있다. 요사한 뱀한테 홀리운, 어쩔수 없게 된 낯빛이다.
나의 아래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소동하기 시작했다.
“그냥, 그저, 발자국을 내고싶었어요.” 넌 비로소 해명을 시작했다.
“책에서 봤는데요, 오빠도 봤는지 모르지만, 어느 책에 이런 글이 있거든요. <자기 발자국을 보라. 발자국을 살펴보면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된다. 언젠가는 그 발자국 다시 밟으며 자기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될것이다!> 정말 재미있는 글인것 같았어요. 근데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갈것이다, 란 말이 좀 불길하게 생각되였어, 그래서 뒤로 발자국을 내봤어요. 기실 나는 마을까지 왔는데 내 발자국은 강으로 향했으니 난 강쪽으로 갔을까 마을로 갔을까? 호, 재미있잖아요?”
“어, 그래? 애는 애로구나, 재미있구말구, 허허.”
나는 너의 코등을 쓸어주었다. 넌 얄팍한 입을 비쭉거렸다.
“오빠 말하는거 보지, 내가 뭐 어린앤줄 알아요? 나도 알것은 다 안다구. 참, 책본것 또 하나 얘기해줄까? 호호, 이번엔 정말 재미있어요. 귀신이야기가 아니구, 정말 있은 사실이라는데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 일이 생길수 있는건지?”
넌 언제부터 반말과 존대말을 분별없이 섞어하기 시작했다.
“이건 심양에서 있은 일이래요. 지원군출신인 성이 오가란 사람이 3.8선부근에서 싸우다가 남조선군대의 총에 맞았대나? 못생긴 군대가 한쪽 눈을 찔끈 감고 총을 뿅 쏘는것을 그 사람이 그만 보게 되였대요. 그래서 어이구, 하고 쓰러지는 찰나에 말이얘요, 혼비백산한 그 사람의 혼이 몸에서 쑥 빠져나가 나무가지우에 껑충 올라앉게 되였대나? 호호∼ 웃긴? 정말이란데두, 우리 큰아버지한테도 그 얘길 했더니 그건 그럴수 있는기다, 하시던데요? 그래서 그 혼은 말이야, 에라 모르겠다. 이 잘란 전쟁은 왜 하노? 하필이면 같은 민족끼리 싸우고 죽이면서 와 이 지랄들을 하지? 이 반도땅은 정말 못살 곳이다. 때려죽인다해도 여기선 안산다. 잘있어라 나는 간다, 하고 구름타고 바람타고 하염없이 떠나갔대요. 산도 넘고 강도 건너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곳을 가던 중에 말인데, 눈에 웬 젊은 색시가 애를 낳느라 몸부름치는게 보이더래. 그래서 에라 잘됐다, 하고 애가 출생하는 찰나에 애의 머리속으로 혼이 쑥 들어가버렸대요. 그래서 그 죽은 사람은 이 세상을 다시 살게 되였다나? 호호.”
“허허허, 넌 정말 환상가로구나. 얘기도 제법 잘 꾸미는데?”
“아이, 책에서 봤다는데두 그래. 내 생각엔, 그 오가란 사람은 아마 우리 조선족인것 같아, 안그래?∼ 호호, 그런데 더 이상한 일은 뒤에 생겨났다데요. 그 애가 자라면서 제 엄마한테 자꾸 엉뚱한 소리를 했대요. 우리가 살던 집은 여기 아닌데 왜 여기서 사느냐. 난 도무지 이집 사람같지 않는데 왜 당신들과 함께 사는지 모르겠다. 내가 살던 곳은 마을이 어떻게어떻게 생겼고 자기네 집에는 누구누구랑 있는데 다들 이름이 뭐고 내 색시는 누구이다고 자세히 이야기하더래요. 그러니 애의 엄마가 알턱이 있나요? 눈이 뒤집혀지는거지! 호호, 그래서 마을사람들도 애가 돌았다 어쨌다 손가락질을 했대요.
그러니 그 사람이 스무살나던 해인가? 길을 떠나게 된거지. 그리 멀지 않은, 한 오륙십리쯤 되나봐요. 한 산등성이를 넘으니 버드나무 우거진 아담한 마을이 보이더래요. 우리 마을처럼 큰길이 동서남북에 십자가를 냈고 동구밖에는 느티나무고목이 있고, 고목 왼켠에는 두칸짜리 초가가 아담히 자리잡고있고, 돼지며 소며 닭이며, 동네애들이 골목을 누비고있더래. 너무나 익숙한 고장이였지, 그래서 그 사람은 곧장 그 초가집을 찾아갔대요. 집에는 쉰살이 가까워보이는 녀자하고 일흔이 다된 로친이 살고있더래. 오씨는 그들이 아무리 늙었어도 너무 눈에 익은거야. 그래서, 왜 날 못알아보겠냐? 난 누구인데 당신들의 이름은 무엇무엇이 아니냐? 하고 눈물코물을 쥐여짜며 얘기를 했대. 생전 보지도 못한 청년이 나타나서 자기네를 보고 엄마니 안해니 해가면서 그러니 두 녀인도 정신이 있겠어? 놀라자빠질 일이지! 그래서 아마도 집을 잘못 찾아들었나보다, 하고 청년을 얼렸다나? 그랬더니 청년은 자기네가 결혼한 날짜와 결혼날 밤에 있었던 일과 지원군에 나가기 전날에 생겼던 일들이며 부부간에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다 이야기했대요. 아닌게 아니라 궤짝을 열고 결혼증을 보니 글쎄, 날짜마저도 기막히게 딱 들어맞더래요. 그 바람에 두 녀자는 꿈인가 생시인가 오래도록 정신을 못차리고다녔다나? 호호, 거짓말 같지요?”
“본래부터 거짓말이구나뭐, 그래서?”
“뭐가? 거짓말이라며?∼그래서 지금은 잘살고있데요.”
“뭐, 오십 가까운 녀자와 이십대 청년이 한집에서?”
“웃기네. 본래 그들은 부부인데 잘못된거 있나요?”
“아니, 그런게 아니고∼”
너의 생각은 당연했다. 부부였으니 나이와는 관계가 없다. 남편되는 사람이 대단해보였다. 옛정을 소중히 여겨 나이차를 극복한것이다. 만약 오씨가 모른척하고 다른 안해를 맞아들였다면? 물론 이야기가 안될것이다. 당신의 첫부인인 진호형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그 녀자도 환신을 해서 이 세상 어디에서 살고있지 않을까? 물론 조건이 있다. 총에 맞아야 하고, 누군가 자기한테 총을 쏘는것을 보고 혼비백산해야 혼이 나무가지우로 껑충 뛰여올라갈수 있어야 한다. 또 반드시 한반도전쟁이여야 한다! 헛헛헛, 나는 실소를 금할수 없었다. 어쨌든 넌 요정이다. 머리속에 뭐가 숨어있는지 의문만 더 짙어갔다.
넌 일어나 앉았다. 나를 흘낏 보더니 주머니에서 사진 한장을 꺼냈다.
“나 오빠한테 보여줄게 있다. 이 사진 좀봐. 둘다 잘생겼지?”
어깨나란히 반신상을 한 청춘남녀였다. 군복을 입고 팔에 붉은완장을 두르고 가슴에 붉은꽃을 달고서 해바라기꽃같이 웃고있다. 귀가 약간 올라간 녀자의 입매와 거무틱틱한 얼굴에 쏘는듯한 남자의 눈매가 너의 얼굴에서 묘한 조형을 이뤘다. 내가 알기로 사진의 임자는 어린 너를 이 세상에 홀로 남겨두고 저 세상에 간 장본인들이였다.
“닮았어, 비슷해. 사진만 봐도 인차 알수 있을것 같구나.”
나는 감개무량해서 말했다.
“내가 엄마를 더 닮았지? 난 엄마가 좋은것 같아. 웃는 모습이 얼마나 예뻐? 입술은 나팔꽃같고 눈매는 버드나무잎같애. 호, 이런 묘사가 맞는지 몰라도 엄마는 마치 꽃이나 꽃나무만 같아. 볼에 볼을 대면 향긋할것 같구, 가슴에 코를 대면 젖내 달큰하게 날것 같아. 난 여지껏 엄마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엄마가 내 손을 만지고 얼굴을 쓰다듬고 입술에 키스를 해주고, 그러면 난 엄마의 목을 끌어안고 너무 좋아 흐느낀다. 호, 건데 깨고보면 항시 꿈이더라. 엄마는 없었어요, 영원히 나타나주질 않았지!∼ 가끔 아빠생각도 한다. 그런데 생각이 잘안나요. 그래서 또 생각해보고, 그래도 안나면 오빠랑 진수오빠랑 찾아갔지∼ 우리 엄마 아빠도 혹시 그 사람처럼 다시 태여나 이 세상 어디에서 살고있지 않을까?”
“되지도 않는 소린? 넌 참 별란 생각을 다하구나, 쩟쩟.”
“호, 그걸 읽고 이렇게도 생각해봤다. 내가 오빠를 좋아하니까 우리 아버지가 혹시 오빠의 몸을 빌려 다시 태여난게 아닌가구?∼ 그럼 난 누굴까? 우리 엄마가 혹시 나한테 온게 아닐까? 그럼 우리 아버지와 엄만 다시 만난게 아닐까?”
“어이구, 이눔 기집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정말 못하는 말이 없구나! 어쨌든, 넌 무서운 애로다. 이제 그만하거라.”.
나는 또 한번의 어떤 마를 느끼며 너를 밀치고 일어났다. .
며칠밤 나는 똑같은 꿈을 꾸었다. 모든것이 혼란스러웠다. 녀자 셋을 만났는데 두 사람은 죽었단다. 먼저 간 당신 부인들이였다. 현신할수 있는 갓난애를 찾아달란다. 엄마가 비웃으며 가당할 소린가고 꾸짖었다. 세 녀인은 다투다가 이번에는 아버지한테 가서 행악질을 했다. 시에미 역정에 개배때 찬다고 당신은 갑자기 내뺨을 후려쳤다. 니놈이 뚱딴지같이 무슨 현신얘기를 해서 이토록 소란을 피우냐? 그럼 니놈은 누구의 혼을 타고나온거냐 엉? 하고 불호령을 했다. 이때 녀자 셋이 웬 일인지 삽시에 자취를 감추었다. 급기야 이상한 요화가 그 자리에 하얗게 피여났다. 잎아래 큰가시 셋이 날카롭게 돋아있다. 내손은 금방 거기에 찔려 피가 났고, 피방울은 떨어져 꽃잎을 발갛게 물들였다. 아아, 얼굴이 보였다. 그 꽃속에서 급기야 꼬마요정이 현신하고있지 않는가!
나는 니가 밉다. 무엇이 너와 나를 만나게 했는지 정말 미워났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