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류수(리동렬 장편소설 연재 9)

2009-03-23     이동렬

 

그 시절, 나는 단순하게 변해갔다. 단순해질수밖에, 원래부터 단순하니까. 그러고보면 말을 해도 앞뒤가 어울리지 않을만큼 단순했다. 내게 세상으로 통했던 길은 고향의 작은역,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객차의 파란색깔이 보내는 어떤 메시지와 기적소리였다.

 

가끔 가까운 현성역에 오가기도 한다. 고향역에서 흔들거리며 걸어내리면 금방 동네에 들어선다. 십자가를 그은 큰길이 또 한 세상이다. 아침저녁으로 동네젊은이들이 모여서 장난질을 한다. 웃고 떠들고 흥얼거리고, 서로 해야할 일들을 묻고 저녁 데이트나 놀음약속을 한다. 동네일을 비롯해 세상사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나는 그런데에 별로 휩쓸리지 않았다. 우리가 겪는 시대는 내가 모를만큼 많이 변해갔다. 나라 주석님이 세상 뜨신후 백지선생(장철생을 지칭)에 의해 잠시 페지되였던 대학입시제도도 회복되였다. 뜻만 가지면 공부를 시작할수 있다.

 

어느덧 남조선뉴스가 뒤골목화제의 이슈로 떠올랐다. 누구네집에는 편지를 보냈더니 회답이 왔더라 어떻더라. 서로 고국의 문명과 자기들과의 뉴대관계를 애써 력설했다. 이미자, 현철, 주현미의 노래가 은연중에 안방문화를 장식해갔다. 이삼년전만해도 불법이던 일이 슬슬 풀려나갔다. 그러나 모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였다. 아주 먼 세상에서 벌어지고있는 사건들로 여겨졌다. 나는 하냥 나일뿐이다. 변화가 필요없었다. 고향의 풀이나 나무처럼 그대로 자연스레 살면 그만이다. 부모님들이 시험공부를 하라고 설복해도 동네 귀동냥을 보냈다.

 

복선녀도 애가 나 내 등을 두드려댔다.

 

“니 알기나 해? 정신이 이상해졌다구, 요 머리에 문제가 생겼단 말이다!”

 

자폐증같은것이 있단다. 나는 실실거리기며 묵묵부답했다. 자폐증이라니? 누굴 위한 자폐증인가? 내 마음이 누구보다 넓다고 생각한다. 꽃나무가 꽃을 피울수 있는것은 하늘을 믿고 태양을 믿었기때문이다. 이 허허로운 마음과 허허로움의 벌과 발 편히 뻗을수가 있는 허허로움의 집이 곧 나의 꽃이요 태양이라고 생각한다. 복선녀가 또 하나의 꽃이요 태양일것이다. 무엇이 내 마음을 좀먹을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를 따라 나는 일하러 가고싶으면 가고 싫으면 골방에 박혀 책만 읽었다. 당신을 존경했다. 당신의 서랍에는 동의보감이요 본초강목이요 침구료법같은 서적들이 수십권이 들어있다. 시간만 나면 당신은 산을 간다. 약재를 캐와서는 환약을 만들어 동네환자들한테 무상으로 공급해준다. 그러면 환자네 가족들은 찰떡을 쳐온다 개를 잡아온다 어쩐다 해가며 온갖 성의를 보여왔다. 할매의 입이 함박만큼 벌어진다. 아들자랑이다. 또 찾아오라. 약 걱정은 일절 하지 말라 신신당부한다. 할매가 바로 의사였다.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드나들어야 사는 멋이 있노라 했다. 지킬것이 없고 주게 되니 마음은 풍요로워진다. 그에 반해 엄마는 내놓고 크게 떠들지는 않아도 속내는 달랐다. 받을 돈은 다문 얼마라도 받아야 한단다. 귀가 밝은 할매는 아무데나 대고 곧장 대통을 두드려댔다.

 

“돈밖에 몰라 저년은, 연변에서 살지 무엇하러 여기 왔노? 그 땅에서 그라문 또 잘살낀가? 돈, 돈, 돈 흥, 우리가 돈따문에 여기 와서 이렇게 사는줄 아노?”

“아이 할매, 듣겠다. 쉿, 좀 조용 나 책봐요.”

 

할매는 내가 책을 본다면 무조건 두손을 든다. 아들을 하늘만큼 알기에 손자도 금옥같이 취급한다. 인애만 외몫에 나게 되니 불평 부릴 때가 있다.

 

“우리 할맨 알아준다니까. 흥, 천도끼할매 몰라주면 큰일나지. 그 도끼 치켜들고 녀자들은 막 패고 남자들은 뒤에서 요렇게 지켜주고∼ 에, 할매 참, 고현타(고약하다)!”

“저년, 저년∼ 에이, 저 고현년을 봐라, 버릇없이!”

할매가 짐짓 대통을 찾느라 팔을 휘젓는다. 별명이 천도끼할매이다. 인애가 다람쥐처럼 문밖을 튄다. 진한 희극편이다. 나는 손벽을 치며 즐겼다.

복선녀가정에도 변화가 생겼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교직에서 물러났고 그녀가 대신 소학교에 들어가 교편을 잡게 되였다. 정책덕분에 하루사이 복선생으로 탈바꿈했다. 련애를 하는 멋이 조금 틀려져갔다.

“복선생님, 오늘저녁은 비과가 바쁘겠네요?”

복선생은 교사가 안경너머 학생을 노려보듯 짐짓 위엄과 틀을 차렸다.

“그냥 좀, 바쁘다∼”

복선녀는 그냥, 이란 말을 참 잘했다.

“선생님, 그럼 전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소설책 한권을 뽑아들고 일어섰다. 러시아비행사의 불굴의 삶을 엮은 참된 사람의 이야기, 였다.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의 비행기화력에 집중되여 추락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그후 절단된 다리에 가짜다리를 해넣고 하늘에서 재삼 용맹을 떨친 주인공의 사실이 눈물겹다면서 그녀가 추천한 소설이였다.

 

우리는 몰래 동구밖을 빠져나갔다. 때로는 논두렁에 앉아, 때로는 옥수수밭이나 콩밭에 들어가 금단의 열매를 훔쳐먹었다. 우리사이 변한것이 있다면 더 은밀해진것과 가끔 책에서 훔쳐온 말구절들을 그대로 옮기거나 고쳐 써먹는것, 현실을 도피하고픈 욕망인것 같았다. 눈이 맞으면 어디론가 둘이 숨어가서 입맞추고 쓰다듬어주고 그짓만을 하는, 그것을 사랑인줄 아는, 사랑이라 말하면 자본주의냄새가 나는것 같아 그냥 좋아한다고만 하던 시대에 우리는 떳떳했다. 사랑을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해 당신! 그녀는 그 말을 듣기 좋아했다. 당신, 사랑한다, 는 말이 느끼하다고 몇번쯤 곱씹더니 어느날 비로소 그 말에 해가 서산에 뜨듯 눈귀에 보일락말락 고운 잔주름을 실어왔다. 입에 입을 달콤하게 맞춰왔다. 가볍게 속삭이였다. 나두 당신, 사랑해! 내 입술에 닿는 당신의 입김은 가을해살같이 구김이 없다. 따뜻하고 감미롭고 포근했다. 밝은 해살의 앙금이 곱게 져왔었다.

 

당신 사랑해∼ 사랑해 당신∼

순수 우리말 그대로였다. 지금도 가만히 씹어보면 가슴속에 금시 복사꽃이 화사히 피여나는것만 같다. 그래서 순수가 좋았다. 순수를 믿었다. 세월이 어떻게 변하든지 우리 사랑은 순수해질것이다. 우리는 젊었다. 랑만이 우리의 마음을 부풀게 했다. 우리가 읽은 고전이 슬프고도 진한 사랑이야기로 마음을 울려왔다. 러시아의 문학이 주는 영향이 컸다. 복선녀는 똘스또이의 장편소설 안나까레니나를 좋아했다. 세속의 허위와 맞서 싸우는 까레니나의 활기찬 몸짓과 사랑은 거의 외설적으로 우리한테 다가왔다.

 

우리는 강가 모래톱에 앉았다. 강물은 끝없이 주절거리며 차게 흐르고, 하현달은 하염없이 깊어갔다. 그녀는 나를 자기 무릎에 눕혀놓고 손을 슬쩍 잡고 소설속의 일부 구절을 입속으로 가만히 외웠다.

 

“그는(레원) 태양이 자기한테로 가까이 다가오는것을 느끼였다. 그 녀자는 한쪽 구석에 있다가 높은 편상화를 신은 날씬한 다리를 서툴게 옮겨놓으며 겁을 먹은듯 조심스레 그에게로 지쳐오는것이였다∼ 매양 뜻밖에 처음 만나보기라도 하는듯 그를 몹시 황홀케 한것은 그 녀자의 부드럽고 조용하고 진실성에 넘치는 눈과 더우기는 그 미소였다. 그리하여 그 녀자의 미소는 항상 레윈을 흡사 마술의 세계에라도 끌고들어가는듯 했고 유년시절에 간혹 느낀 달콤한 감상적인 기분에 휩싸이게 됨을 느끼였다∼”

 

내눈에도 태양이 떴고 정열의 불덩이가 다가오는 황홀감이 찾아왔다. 그래도 달의 찬색이 재빨리 환각의 열기를 씻어갔다. 복선녀도 나의 태양일까? 자문했다. 그런 태양은 아닐것이다. 더 색다르고 순수한 태양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눈에서 밤이슬같은것이 내 코끝에 한두방울 떨어졌다. 안나까레나의 생애 마지막의 장면을 마치 시를 읊듯 읽어갔다.

“ <저리로!> 차량밑의 어둑시그레한 구석을, 석탄가루 섞인 모래에 뒤덮인 침목우를 굽어보며 안나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저기 한복판으로, 그럼 난 그를 처벌하며 모든 사람들과 자신에게서 영영 해방되는것이다.> 그 녀자는 자기앞에 다가온 첫차량의 바퀴중간에 몸을 던지려 하였다∼”

 

복선녀의 눈확에 짭잘한 바다물이 가득 고여갔다. 혀로 그것을 가만히 핥아주었다. 그녀는 나처럼 왜 그토록 감상적일까? 새벽이슬에 젖은 불길한 면사가 선한 그 마음에 나올거렸다. 그게 딱히 뭔지 몰랐다. 애처로워보였다. 걱정마, 잘될거니까! 나는 우리 엄마를 념두에 두고 위로해주었다. 푸시킨의 시를 조용히 읊었다.

 

“사랑은 벤취우의 한숨도 달밤의 산책도 아니라네. 흐린날도 눈우도, 같이 한평생 살아야 하느니 사랑은 아름다운 노래와 같은것, 그러나 노래는 쉽게 지어지는게 아니라네.”

턱을 고인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들었다. 엷은 구름에 슬픈듯 어설프게 걸린 하현달을 바라본다. 푸시킨의 시가 창백한것 같았다. 그녀의 아픈속을 다는 무마해주지 못하니까.

“네 목소린 참 듣기 좋다. 정말 듣기 좋다. 이 밤이라서 더더욱 듣기 좋다. 우리 선비님이 시 하나는 잘 읊네. 난 왜 그 시가 그리 좋은줄 몰랐을까?”

“괜히, 겁을 내고있었으니까.”

 

“그래도 꽃은 필 때 막 폈으면 좋겠어. 봄이 오면 저산에 함박꽃이랑 개나리랑 피듯 자연스럽게, 사랑도 그래요. 필 때 활짝 폈으면! 그 시를 들으면 난 좀 그렇다. 사랑이란게 우리가 아는것만큼 다는 아닌것 같아.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있는줄 모르겠다.”

“내가 있잖나, 겁내지 말라니까그래.”

“그래, 네가 있지. 당신, 우리 선비님이 있지. 겁내지는 않는다, 정말이야.”

그녀는 품에 따뜻하고 촉촉한 얼굴을 가만히 묻어왔다.

 

언제부터 나는 선비님이 되였는지 모른다. 동네에서 다들 그렇게 불렀다. 저기 선비님이 오시네. 그러면 웃음이 슬그머니 나왔다. 왜서 선비행세를 했을까? 정말 선비틀이라도 있는가? 일은 잘 나가지 않고 책만 읽는다고 비꼬는것이겠지, 아마도? 나는 자기를 잘 안다. 아무려나 괜찮았다. 복선녀만 곁에 있다면 겁날것이 없다.

 

지금도 그 이슬 내리는 밤들을 잊지 못한다. 온밤이 가도록 서로 끌어안고 밤을 지새우다가 날이 희읍스름이 밝아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곳이 비닐쪼각을 깐 옥수수밭이 되기도 하고, 근처 산속에다 베놓은 쑥대단으로 지은 풀집이 되기도 하고, 주인이 없는 헐망한 참외보초막이 되기도 했다. 이슬에 푹 젖어 구겨진 옷, 창백해진 얼굴, 피발이 선 눈. 우리는 마주보며 피식거렸다. 다시 끌어안고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간밤의 열기는 비록 잦아들었지만 이제 밥을 먹고 구들에 엎어져 자다가 깨여나면 떠오른 태양과 함께 우리는 다시 타오를것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사랑의 피는 절대 마르지 않으리라.

 

솔 넓은 국방색 바지, 체크무늬의 마후라!∼ 복선녀는 가끔 책을 보다 턱을 고이고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사색이 깃든 얼굴이 백랍처럼 굳어져있고 다시 유리창에 비낀 내 얼굴을 알아보고 눈귀에 잔잔한 들꽃웃음을 싣는다. 흑판에 교편대를 갖다대고 두번 똑똑 두드린다. 애들한테 이렇게 따라 부르게 한다. 우리 나라는 중화인민공화국. 우리 나라 수도는 북경. 북경에는 천안문이 있고 천안문에는 모주석이 계신다. 우리는 모주석을 사랑한다.­ 그때까지 소학교1학년 조선어문교재 1과에는 그런 내용이 실린것 같았다. 고등학교시절 내가 그렇게 흠모했던 수학골이였던가 의심이 갈 때가 많았다.

 

슬쩍 내리깔다 뜨는 눈이 그리 맑고 맑을수가 있을까.

“난 애들이 좋다. 천진하고, 맑고, 걔들한테 글 가르치는게 소원이거든.”

“내사 공부를 잘하지 못했으니 괜찮지만, 넌 참 아깝다.”

“아깝긴? 난 별 욕심이 없어요.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마치 운명적인 드라마의 한 장면만 같지 않어? 안그래?”

“운명적인? 글쎄∼ 그럼 그렇다고 하자.”

복선녀는 소리없이 웃더니 기타를 들고앉았다. 학교에서 갖고왔었다. 나는 따뜻한 구들에 배를 붙이고 누웠다. 다른 사람은 없다. 퇴직을 서둘러 한 그녀 부친은 회사를 꾸린다고 북경에 나갔고 모친은 하루도 빠짐없이 일하러 다녔다. 남동생 둘은 현성 한족학교에다 기숙시켰다. 그녀네 집이 너무 편하고 좋을뿐이였다. .

“좀 배웠는데∼ 잘 칠줄 모른다.”

 

그녀가 기타줄을 튕겨갔다. 내가 모르는 곡이다. 어디서 들어본것 같기도 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너네 엄마한테서 배웠는데, 아니 몇번 들어서 안거야. 후에 너네 할매한테서 제대로 배웠다. 너네 할맨 정말 잘하시더라. 그래도 난 너네 엄마가 부르던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봄이 올 때 너네 집 울밑에 봉숭화가 피면 너네 엄만 뜨락의 작은 꽃밭앞에 쭈크리고 앉아서 풀을 뽑고 김을 맸었지. 흰저고리에 검정베르베트치마를 입고 흰수건을 머리에 곱게 쓰고 혼자서 가만히 부르더라. 목소리가 얼마나 부드럽고 고운지 몰랐어. 노래소리가 마치 내 가슴에 고요히 날아오는 봉숭아꽃잎처럼 느껴지는것 있지? 정말 감동되더라. 그후부터 난 너네 엄마의 모습이 달라보이더라. 너무 대단해보였다. 비록 날 좋아하지는 않으나 그건 별문제였어, 괴팍해진 성질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래, 리해가 간다. 아마도 속고생 무던히 한 탓이겠지!”

 

“응? 허, 너 정말 많이 컸구나. 속이 언제부터 그리 깊어졌지? 우물처럼 말이야. 그런데 무슨 노랜데 그리 신비스럽지?”

그녀는 대답은 안하고 기타줄을 골라 다시 가볍게 몇줄을 튕겼다. 이윽고 약한 음색에 부드럽고 고저장단의 기복이 심한 노래소리가 정겹게 흘러나왔다. 내 눈앞에도 봄이 꽃단장을 하고 화사하게 나타났다. 꽃과 잔디와 흐르는 내와 동네 가까이에 있는 언덕과 푸른 숲과 싯누른 황토길과 그림같은 초가집이 우렷이 떠올랐고 그 모든것이 어디론가 둥둥 떠가는 영상이 눈앞을 스치였다. 우리 엄마의 십팔번지 락화류수, 였다.

 

이 강산 락화류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우에 심은 사랑아

세월에 꿈을 실어 사랑을 심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노래도 멎고 기타소리도 끊기듯 멎었다. 화사한 꽃살이 분분히 떨어지는것 같은 여음이 집안에 한동안 고요히 맴돌았다. 왜서일까? 마음이 슬퍼질까 한다. 노래가, 곡이 너무 좋으니 그런가? 꽃이 피였다기보다 피여서 물우에 지고 그 물이 끝없이 어디론가 흘러간다. 명년에 피는 꽃은 또 그 꽃이며 흐르는 물 또한 그 물일까? 그 꽃에 그 물이 흘러 어디로 갈건가? 난 너무 감상에 젖어갔다. 복선녀도 그렇다고 눈을 흘겼다.

 

그녀는 사주팔자를 본 이야기를 했다. 떠돌아다니는 로인한테 가만히, 그녀 엄마가 저녁에 선화네 큰집으로 끌고가서 보였다고 한다.

 

“그 말 믿어야겠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말띠니까. 녀자말띠는 못쓴다나? 띠중에서도 바람기가 제일 많고 허세부리기 좋아하고 충동적이고 완고하고 변덕스럽고 어쨌든 나쁜 말은 다 하더라. 또 녀자는 그릇과 같아 밖으로 돌리면 깨지기 쉽대. 그 말은 말띠니까 그냥 밖을 나돌다 일을 낸다는거지. 지금은 얌전히 있어도 언젠가 밖을 나가게 되고 그러면 불행해지게 된다나? 팔자가 그렇게 됐으니 어쩔수 없대. 다행히 여름에 태여나서 겨울생보다 좀 낫대요. 중년에 들어서야 물건너 먼곳에 가서 안착을 하고 고목에 꽃이 피듯 황금기가 찾아온다나? 참고 견디고 온중해야 불구덩이에 빠지지 않는다더라. 바람기 많은 남자하고는 절대 가까이 하지 말고, 특히 말띠생의 남자하고는 상종도 하지 말라더라. 그러니 아마 니같은 사람을 견주어서 하는 말이 아닐까? 호호.”

 

“뭐야, 그 로친? 정말 날 보고 그러는게 안야? 내가 바람기 많은가? 괘씸하네.”

“글쎄, 모르지, 후에 어떻게 변할지?”

“아무리 어떻게 변하더라도, 넌 내 색시야! 우리만 좋으면 그만이지, 안그래?”

“하긴 그래, 왜 그런것을 믿겠어?”

가볍게 웃고 그녀는 또 기타를 탔다.

이때 방문앞에 웬 녀자애가 불쑥 나타났다. 언제 들어왔는지 몰랐다. 당돌한 계집애, 복선화였다. 얼굴이 발가우릿해서 신문지로 싼 붉은가위 목책을 제 언니한테 건넨다. 애가 소리없이 자리를 뜨자 우리는 히히닥거리며 목책을 펼쳤다. 너무 뜻밖이라 몹시 놀랐다. 내가 보지 말아야 할 글이 첫장을 가득 채워왔었다.

 

보고싶은 선녀동무에게:

 

어제 시내에 갔다가 목책이 좋아보이기에 하나 샀소. 우리가 졸업한지도 어느덧 이년이 넘었구려. 그 사이 선녀동무는 어엿한 인민교사가 됐고 나도 우리 마을 민병련의 부련장이 되였소. 그런데 선녀동무는 마을활동에 참가하는 적극성이 부족한것 같소. 비평은 아니지만 일부 청년단원들이 의견이 많소. 조심하기 바라오. 나는 어제 입당신청서를 써서 당조직에 바쳤소. 당의 고험을 받고 꼭 입당을 쟁취하겠소. 동무도 인차 쓰기를 바라오. 나는 한다면 정말 하는 성질이요. 너무 소극적인 동무와 휩쓸려다니지 말고 우리 함께 손을 잡읍시다. 우리는 우리의 고향을 잘 건설해나갈것이요. 다른 사람 부럽지 않게 행복하게 살수 있을것이오. 난 동무를 믿소. 동무도 나를 꼭 믿기 바라오. 난 예전에 동무가 알던 남수가 아니요. 전에 부끄러움 잘타던 남수는 죽고 이젠 사내대장부로 새롭게 태여났소.

 

난 정말 선녀동무가 보고싶소. 한 마을이니 매일 볼수 있겠는데 보지 못하게 되니 속에 불이나오. 그리고 퇴폐적인 소설책만 읽고다니며 만사에 무관심하는, 너무 소극적인 동무하고는 적당히 거리를 두는게 좋겠소. 사회에 나와서는 그래도 적극적으로 발전하기에 힘써야 전도가 있소. 요즈음에 저녁이면 나는 뒤뜰에 나가앉아 동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오. 그런데 좀처럼 볼수가 없어 안타깝소. 동무의 손을 한번 잡아보고싶소. 난 동무를 고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소. 우리는 영원히 변치않을 전우이며 동무가 될것이요. 난 동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있으리라 믿소.

 

동무의 회신을 학수고대하겠소. 꼭 희소식이 있으리라 믿소.

혁명적경례를 드리오.

 

X년 X월 X일

남수로부터.

 

선녀가 나를 보았고 나도 선녀를 보았다. 밑줄을 그은, 퇴폐적인 글만 읽고다니는 소극적인 동무, 란 구절이 내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왔다. 뭐, 보고싶은 동무? 혁명적, 경례를, 드린다? 소웃다가 꾸레미가 터질 노릇이다. 이 자식, 보자보자하니까 이젠 나하고까지 녀자 하나두고 다투려 든다? 미친자식, 꼴 좀 먹어봐야 정신차리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분통이 터졌다. 그녀도 손등으로 입을 막고 내 눈치만 살폈다. 눈가장에 붉은 기운을 싣고 까박거리더니 급기야 소리내서 웃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는 손벽을 치며 박장대소했다.

 

아무튼, 미련하고 엉뚱한 자식이였다. 그래도 인정할것은 인정해야 한다. 많이 자란 편이였다. 퇴폐적이고 소극적이란 말도 음미할만했다. 이 시대에 걸맞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을 나누었으니까. 지금은 옛말거리지만 퇴폐적이고 소극적인 동무, 란 말은 심심하면 나를 웃기는 에피소드로 되였다. 누워있다가도 그 생각이 나면 나는 웃어버린다. 기실 동무란 단어는 어깨동무처럼 단어조합이 잘되여야 감칠맛이 제대로 난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