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나의 운명, 나의 사랑”

요네타니 후사꼬(일본,김포대명초 학부모)

2009-02-10     동북아신문 기자

한국과의 인연

나의 고향은 일본 교토후(京都府) 교토시(京都市), 그 옛날 동경(東京)이 수도가 되기 전에 무려 1,200년 동안이나 일본의 수도였던 곳이다. 동경(東京)이라는 이름도 동쪽의 교토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경주 정도에 해당하는 문화유산이 많은 아름다운 도시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키요미즈 사원(淸水寺)’과 ‘금각사(金閣寺)’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문화관광지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때에도 많은 문화재덕분에 교토만은 공격을 피하기도 했다.
 
나는 그 곳에서 태어나 일본에 ‘한류’라는 말이 등장하기 전인 1997년 6월 신앙을 통해 남편을 만나 한국으로 오게 됐다.
 
언어도 문화도 전혀 다른 이국땅이었지만 왠지 낯설지가 않았고 오히려 친척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함과 따뜻함마저 느꼈다.
 
내가 한국으로 시집을 오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지만 ‘어쩌면 나는 한국으로 올 “운명”이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우리 큰 딸만 했던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의 일이다. 어느날 텔레비전을 켰는데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이 내 귀에 쏙 들어 왔다. “안녕하십니까, 한글강좌”라는 제목의 방송이었는데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일까?’ 어린 마음에 받았던 그 신선한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다른 나라 말도 많이 들어보았는데 왜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이 그렇게 내 마음속 깊이 들어온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 때 이미 나의 운명이 내게 신호를 보낸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이후 한국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91년에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해 1997년까지 몇 차례 한국여행을 하기도 했고 제주도에도 가 보았다.
 
지금은 ‘한류’바람이 거세게 불어 한국으로 여행을 오는 일본사람들이 많아졌지만 당시에는 한국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도 한국을 여행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을 때였다.
 
몇 차례 한국을 방문하면서 한국인들이 웃어른을 공경하는 모습이나 이웃의 기쁨과 슬픔의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함께 참여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일본에서는 보기 힘들어진 모습이라 매우 인상적으로 생각되었다.
 
반면 결혼을 하고 한국에 적응하기 전 한국인들의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행동은 나에게 적지 않은 상처가 되기도 했다.
 
버스나 택시 기사님들의 난폭운전과 불친절, 신호위반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보행자들,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놀랍고 두려웠었다.
 
일본은 환경을 중시하고 손님에게는 절대적으로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종업원의 기본적 태도인데 ‘정’ 많은 한국 사람들이 조금만 더 친절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한국 남편과 결혼을 해 한국에 살게 되었다. 그것도 다국적 대가족 속에서…
 
국적도 세대도 다른 다국적 대가족 속으로

우리집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필리핀까지 세 나라 사람들이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내가 결혼한 후 1999년 시아주버님께서 필리핀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며 우리 집에 함께 살게 되면서 우리 집은 아버님, 어머님, 형님 부부와 우리 부부가 한 지붕아래 7년을 함께 살았다.
 
그 7년 동안 형님 부부에게는 두 아이가, 우리부부에게는 세 아이가 생겨 어느새 11명의 대가족이 되었다.
 
요즘에는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한국사회에서도 이런 대가족은 흔치 않은 일이 되었지만 우리 식구들은 매일 즐겁고 행복했다.
 
동네사람들은 어떻게 국적이 다른 세 나라 사람들이 한 집에서 싸우지 않고 살 수 있냐며 신기한 일이라고 하셨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지만 재미있는 일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처음 우리의 언어는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닌 손짓, 몸짓, 표정이었고 시어머님이 뭔가를 가지고 오라고 하시면 두 며느리가 각기 다른 것을 가져다 드려 가족 모두를 웃게 만들기도 했다.
 
또 두 며느리가 함께 만든 어설픈 한국요리에 큰 며느리의 필리핀 요리, 작은 며느리의 일본요리가 매일 식탁에 올라 가족들은 한동안 새로운 맛에 익숙해지느라 고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시부모님은 두 며느리의 음식에 아무런 불평 없이 항상 “맛있다, 새롭다”라고 말씀하시니 그 깊은 사랑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이곳은 농촌이라 배워야 할 일도, 해야 할 일도 너무나 많다.
 
결혼 전 해보지 않았던 농사일도 배워야 했고 한국며느리들도 하기 어렵다는 된장, 고추장, 간장 담그는 법도 배워야 했다.
 
김장을 할 때에는 배추 150포기에 순무김치, 동치미, 짠지까지 골고루 담아야 겨울 식량을 준비할 수 있었으니 이런 일들을 모두 배워나가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지 상상해 보시라! 하지만 이제는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 더 잘 한다는 칭찬의 소리를 자주 듣게 되었다.
 
지금은 형님가정이 분가해 나가시면서 우리 부부가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대가족으로 살았던 그 7년이라는 세월은 나에게 있어 귀한 경험이자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일본에서 핵가족으로 도시에서만 살았던 나에게 결혼 후 모든 생활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배울 것이 너무나 많았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과 큰아빠, 큰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덕분에 아주 밝고 씩씩한 아이들로 성장하고 있다.
 
지금은 떨어져 사는 큰아빠, 큰엄마를 그리워하고 사촌끼리 깊은 정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형님과 나는 외로운 이국생활을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고 있다. 같은 외국인이다 보니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느끼는 일이지만 아직까지 한국인들은 외국 사람들에 대해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에도 ‘언어의 벽’보다 더 높은 것이 ‘민족의 벽’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쩌면 내가 일본인이어서 민족의 벽이 더 높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일본에 있을 때 나는 일본과 한국의 아픈 과거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고 한국에 와서 살면서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했던 일들을 알게 되어 놀라고 슬펐으며 내가 일본사람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내 나라가 다른 나라사람들에게 이렇게 큰 죄를 지었다니…
 
그래서 나는 한동안 어디를 가든 내가 일본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기가 싫었고 두려웠다. 일본사람이라는 것을 들킬까봐 어디 가서 말하기도 싫어졌고 당당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엄마가 일본인이라는 것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은 일본의 과거사이고 그 과거에 대해 깨끗하게 사과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이지 한국인들의 이웃인 나 후사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도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아무런 차별이나 정체성의 혼란 없이 잘 적응해나가고 있으며 완전한 한국 사람으로 교육받고 있다.
 
반면 피부색이나 언어가 한국과 많이 다른 곳에서 이주해온 다문화가정들의 사정은 우리 가정처럼 밝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얼마 전 텔레비전을 통해 다문화가정 아동들이 학교에서 잘 적응을 하지 못하고 다른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사연을 보았는데 내 일처럼 가슴이 아팠다.
 
엄마 혹은 아빠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자녀가 차별을 받는다면 그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에 있을까?
 
다문화 가정의 밝은 미래를 위하여

다행히 요즘 한국정부는 결혼이민자와 다문화가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무료 한국어교실, 요리교실, 방문도우미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의 생겼고, 한국인들의 다문화가정에 대한 인식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고 느낀다.
 
정말로 기쁘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한국으로 시집을 왔을 때에는 혼자 신문이나 잡지를 번역하면서 공부를 했고 어디를 가든지 사전을 가지고 다니면서 버스 안에서든 자동차 안에서든 틈만 나면 한국어 공부를 했다.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어려운 일인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이렇게 나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된 요즘이 기적 같고 꿈같다.
 
그래서 나는 요즘 언어와 문화차이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배 다문화가정들을 돕기 위해 ‘외국인 한국어 보조교사’의 자격을 따려고 공부중이다.
 
한국 생활을 먼저 경험한 선배로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서이다.
 
그 어려움과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 자신도 아직 서툴고 부족하지만 작은 힘이나마 나의 경험과 능력을 나누어 어려움을 겪고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값있고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우리 집은 올해 88세이신 아버님과 85세이신 어머님을 모시고 초등학교 3학년인 딸 연희와 5살의 유치원생 연지 그리고 3살의 아들 효원이 이렇게 세 아이를 키우면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아버님께서는 건강하시지만 어머님께서는 많이 편찮으셔서 3년 전부터 기저귀를 차고 계신다. 농번기에는 농사일을 도와야 하고 새참준비도 하면서 큰 아이의 공부도 봐주고 어린 막내도 돌봐야 한다.
 
거기에 어머니의 기저귀를 갈아드리며 건강을 살피다보면 어느새 해가 저물어 주변이 어두워진다. 하루하루가 정말 정신없이 지나가지만 나는 늘 행복하고 감사하다.
 
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고 아껴주는 우리 소중한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인 나를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시고 아껴주시는 부모님, 언제나 나를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남편과 소중한 우리 아이들을 위해 힘들고 어렵더라도 나는 밝고 씩씩하게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의 나의 희망이자 소원은 나 자신이 더욱 노력해서 한국 사람처럼 한국말을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한국에 대해 좀 더 부지런히 배워 외국인이 아니라 제대로 된 한국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또 모든 다문화가정과 그 가정의 아이들이 차별없이 살 수 있는 따뜻한 한국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숙제인 것처럼 느껴지는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좋아지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고 희망한다.


[출처] 경기도 다문화 체험수기 최우수상, 요네타니 후사꼬|작성자 킴기자